[사람들]日 최고 권위 수필경연대회서 최우수상 받은 이정선 씨

입력 2017-03-31 10:49  

[사람들]日 최고 권위 수필경연대회서 최우수상 받은 이정선 씨

제7회 고토노하대상에 '낙지를 곱씹으며' 출품…대학생 부문 최고 영예

"낙지볶음 주제 글이 일본서 통했다는 것 놀랍다…세계유산 전문가가 꿈"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마침내 오랜 소원이 이뤄져 일본에 유학 중인 지금, 이따금 괜스레 아버지의 낙지볶음이 그리워진다. 아버지의 생명력과 낙지의 질긴 강인함이 응축된 그 손맛이야말로 나에게 있어 생의 제2막을 개척하는 힘이다…."

일본 최고권위의 수필경연대회인 '제7회 고토노하(言の葉·고풍스러운 일본어) 대상'에서 대학생 부문 최우수상을 차지한 작품 '낙지를 곱씹으며'의 일부다. '사고력이 돋보이는 작품' 가운데 최우수작으로도 뽑힌 이 수필은 일본 도쿄(東京)대 대학원에서 문화경영학으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유학생 이정선(여·37) 씨가 일본어로 썼다.

일본 고토노하협회가 2011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이 경연대회는 문부과학성·교토(京都)시, 요미우리신문, 아사히신문 등이 후원한다. 일본 전역의 초·중·고교 그리고 대학생, 해외, 일반인 등 6개 부문으로 나눠 치러지며 각 부문 최우수상과 우수상을 준다. 올해는 총 1만4천587건이 응모했고 시상식은 지난 25일 도쿄 국제회관에서 카도가와 다이사쿠(門川 大作) 교토 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한국인으로는 처음 이 상을 받은 이 씨는 31일 연합뉴스에 수상 작품 한국어 번역본과 자기소개서, 수상 소감 등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할 감각의 기억을 엮어가며 삶을 영위한다. 그 단편적인 경험의 한 가닥의 실은 때로는 견고한 직물처럼 연결되어 지금 이곳의 나를 지탱하는 원천이 된다. 나에게 그러한 살아가는 힘이란,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생'의 산물이다"로 시작하는 그의 작품에는 이 씨의 개인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2년 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안정된 회사(한국전력)에 취직한 그는 일본에 유학해 학문을 추구하고자 하는 염원을 가슴 한편에 줄곧 품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협심증과 암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받는 상황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인생의 봄인 청춘, 나는 꿈과 현실의 경계의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면서도 희망만은 놓지 않았고, 아버지가 암 투병에서 서서히 회복하자 꿈을 이루기 위해 회사에 사표를 내고 2015년 문부과학성 장학생 가운데 최고령자로 뽑혀 일본에 건너갔다.

딸의 도일(度日) 소식에 "애잔함이 감돌았던" 아버지는 손수 시장에서 재료를 사 정성껏 낙지볶음을 만들어 딸에게 줬다.

"뭐랄까, 건강을 되찾은 아버지의 요리에는 삶과 죽음의 심연에서 귀환한 구도자(求道者)의 초연한 힘이 서려 있었다. 질긴 낙지를 열심히 곱씹으며 문득 생각했다. 저 깊은 바닷속에서 어부에게 잡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꿈틀대며 저항했을 바로 이 낙지처럼, 10년 전의 아버지는 생과 사의 경계에서 홀로 고독한 사투를 벌였을 것이다…"

딸은 아버지가 요리한 낙지볶음을 맛있게 먹었을까?

"아버지는 분명 생을 굳건히 지탱해 준 원동력이란 의학의 힘뿐만 아니라, 엄마의 정성이 담긴 음식과 가족의 사랑임을 실감했음이 틀림없다. 그런 생각에 도달한 순간,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소용돌이가 북받쳐 올라와 나는 한동안 낙지를 삼키지 못했다."

그렇지만 멀리 일본에 있는 지금, 그에게 아버지가 해줬던 낙지볶음은 그리움의 대상이면서 인생 2막을 개척하는 힘이 됐다고 이 씨는 글에서 담담히 밝힌다.

그리고 "번민에 찬 머나먼 우회 끝에 다다른 그 감각으로부터 살아가는 힘을 얻은 나는, 지금 이곳에서 낙지를 곱씹듯이 앞으로의 나날을 이어가고 싶다"며 마무리 한다.

800자 남짓한 짧은 이 씨의 수필에 심사위원을 맡았던 츄오(中央)대 교수는 "고도의 사고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평했고, 츄우니치(中日) 신문의 한 기자는 이 씨의 이메일로 "불과 800자 속에 단편 소설, 아니 그 이상의 이야기가 있었다. 모국어로도 글을 쓰는 것이 어려운데 일본어로 이 정도의 글을 쓰다니 그 재능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고 소감을 보내기도 했다.

일본 문학을 통해 20살 때부터 일본어 공부를 한 그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주말에 틈틈이 수필, 동화, 독후감 등을 쓴 문학도였다. 사내 독후감 대회에서 최우수상과 우수상을 받는가 하면 지난 2014년 서울시 주최 '채석장 도시재생 관광화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고, 지난해 11월 일본 공익재단법인 '대학세미나하우스'가 주최한 일본 내 유학생 대상 논문콩쿠르에서 은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낙지 볶음이 생소한 일본에서 이를 주제로 한 수필이 통용됐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무엇보다도 언어를 초월한 보편적인 생명력의 힘이 일본인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킨 듯하다"며 "3년 전 봄, 질긴 낙지에 응축된 아버지의 생명력과 소생의 힘에서 받은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이번 수필경연대회를 앞두고 일본 원고지 작성법을 독학으로 터득한 그는 앞으로도 삶의 매 순간, 슬픈 좌절의 기억과 따뜻하고 행복한 추억을 재료로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글을 쓰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내년 박사 과정에 진학해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통해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싶습니다. 한일 양국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활동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전문가가 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유학 직후인 2015년 일본 자격증인 세계유산검정 시험 2, 3급을 동시에 취득했고 앞으로 학업과 병행하며 최고 등급인 세계유산 전문가인 '마이스터'까지 도달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ghwa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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