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크 입센 1863년작 국내 초연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왕이 죽은 뒤 혼란의 시대가 왔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나름의 이유를 내세우며 자기가 나라를 가장 잘 다스릴 수 있다고 외치지만 결국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뿐. 누가 왕이 되어야 하나.
서울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에서 지난달 31일 개막한 연극 '왕위 주장자들'은 '인형의 집'으로 친숙한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이 1863년 발표한 희곡을 국내에서는 처음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150여년전 작품이지만 '왕위'를 '대통령'으로 바꾸면 2017년 봄 한국의 이야기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조기 대선 국면과 절묘하게 맞물리는 내용으로 화제를 모았다.
김광보 연출은 이를 두고 "150년 전 입센 할아버지가 어떻게 한국에서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는지 대본을 보는 순간 한 방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라고 표현했다.
13세기 노르웨이. 스베레왕이 서거하자 왕권 다툼이 시작된다. 선왕의 아들인 호콘(김주헌 분)이 왕이 됐지만 선왕의 동생인 스쿨레 백작(유성주 분)은 6년간 섭정하며 권력을 놓지 않는다. 장성한 호콘은 어머니에게 불에 달군 쇠를 만지는 '불의 시련'을 겪게 해 신의 선택을 받았음을 증명하고 비로소 의회에서 진정한 왕으로 승인받는다. 그러나 스쿨레 백작은 여전히 왕위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놓지 못한다. 교회의 수장인 니콜라스 주교(유연수 분)는 그런 스쿨레 백작을 부추기고 결국 스쿨레 백작은 자신을 스스로 왕으로 선언하며 호콘과 정면으로 맞선다. 신은 결국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연극은 인물들의 정교한 심리 묘사에 공을 들였다. 욕망하면서도 의심하는 스쿨레 백작과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는 니콜라스 주교의 캐릭터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왕위에 대한 확신으로 좌고우면하지 않는 호콘은 다소 평면적으로 그려진다.
배우 유성주는 자신을 믿지 못한 채 끊임없이 의심하는 '햄릿' 같은 백작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표현하며 극을 이끌어간다.
니콜라스 주교역을 맡은 유연수는 시종일관 긴장된 분위기 속에 진행되는 연극에서 주교의 악마 같은 교활함을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며 조였다 풀었다 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김광보 연출은 2015년 서울시극단장 취임 당시 이미 공연을 예정했다며 이 작품이 조기대선 국면과는 상관없으며 각색 과정에서 원본에 없는 내용을 넣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시국과 맞물린 탓인지 왕위를 거머쥔 호콘이 어머니를 멀리 보내며 "왕에겐 너무 애틋한 사람이 곁에 있어서는 안 되고 이끌려서도 유혹당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는 부분 등 일부 대사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연극은 2시간 동안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배우들의 대사량이 많고 대사 속도도 빠르다. 이런 상황에서 공연 초반 대사가 중간중간 잘 들리지 않는 점은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빈 무대에서 배우를 돋보이게 하는 김 연출의 평소 스타일대로 이번 무대도 천정에 왕관 또는 근원을 상징하는 거대한 나무 장치 외에는 단순하게 꾸몄다. 공연은 4월23일까지. R석 5만원. S석 3만원, A석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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