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지난 7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는 대검의 김주현 차장과 권순철 국제협력단장, 몽골의 간볼드 바산자브 주한대사와 에르덴밧 간밧 대검찰청 차장, 임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몽골 공룡화석 반환식이 열렸다. 7천만 년 전 육식공룡 타르보사우루스 바타르의 치아와 갈비뼈 등으로 추정되는 11점의 화석은 한국의 밀매업자가 몽골의 도굴꾼을 시켜 고비사막에서 몰래 파낸 것.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불법 반입됐다가 밀매업자끼리 횡령 고소 사건이 불거지는 바람에 검찰에 압수됐다. 검찰은 압수한 물품의 가치가 매우 높고 몽골이 반출을 금지하고 있는 문화재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문화재청과 협의해 몽골에 돌려주기로 했다.
검찰은 이번 결정이 우리나라로 불법 반입된 문화재를 원래 소유국의 정부에 반환하는 첫 사례라고 밝혔다. 대검의 권 단장은 "한국은 역사적으로 무수한 문화재를 강탈·도난당해 왔음에도 환수하지 못한 사례가 많다"며 "이번 사건처럼 불법 반출이 명확한데도 반환을 거부한다면 우리가 다른 나라에 문화재 반환을 요구할 명분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몽골 정부는 한국 정부에 감사를 표시하며 화석의 소유권을 넘겨받는 동시에 양국 우호를 위해 한국에 장기 임대하기로 했다. 이르면 올 하반기부터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몽골 공룡화석의 반환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쓰시마섬(對馬島)으로 건너갔다가 최근 우리나라에 돌아온 서산 부석사 고려 금동관음보살좌상의 운명이 또다시 주목받고 있다. 쓰시마섬 간논지(觀音寺)가 소장하던 이 관음상은 쓰시마 가이진진자(海神神社)의 통일신라 금동여래입상과 함께 2012년 10월 국내 절도단에 의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가운데 국내에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는 여래상은 2015년 7월 가이진진자에 반환됐으나 부석사가 소유권을 주장한 관음상은 소송에 휘말렸다.
부석사는 "고려 말 왜구에 의해 약탈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고 1951년 관음상 안에서 발견된 결연문(結緣文)에 '1330년 조성해 서산 부석사에 봉안했다'고 적혀 있으므로 환지본처(還至本處)의 정신에 따라 부석사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해 지난 1월 26일 1심 법원으로부터 승소 판결을 얻어냈다. 그러나 검찰이 항소와 함께 낸 인도 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져 국립문화재연구소 수장고에 보관된 채 2심에 계류 중이다.
불교계와 서산 주민 등은 "일본이 취득 경위를 소명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약탈품으로 보아야 하므로 원소유주에게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검찰과 상당수 문화재 전문가들은 "도난에 의한 환수를 용인하면 지금까지의 문화재 환수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또 다른 문화재 도난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지난달 21일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서는 결연문의 진위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는데, 판결 결과에 따라 한일 간 외교 분쟁으로 비화할 수도 있다.
몽골 공룡화석의 반환 소식에 관심이 쏠리는 또 다른 문화재가 있다. 우리나라가 소장하고 있는 약탈 문화재 '오타니 컬렉션'이다.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가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에서 약탈해온 유물로 3분의 1에 가까운 1천500여 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전시되고 있다. 쿠차 키질 석굴사원의 본생도(7세기)와 투루판 아르호 석굴의 천불도(9세기) 등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외국 유물 중 백미로 꼽힌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의 탐험가들은 그때까지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던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사막과 티베트 고산지대 주변의 실크로드를 앞다퉈 답사했다. 스웨덴의 스벤 헤딘, 영국의 마크 아우렐 스타인, 프랑스의 폴 펠리오, 독일의 폰 르코크, 미국의 랭던 워너, 러시아의 세르게이 올덴부르크 등이 그 주인공으로 많은 지리적·고고학적 성과를 거뒀으나 문화재 파괴와 약탈의 주범으로 지탄받았다. 천 년 넘게 잠자고 있던 석굴을 마구 파헤치는가 하면 낙타에 실을 만한 무게로 벽화나 불상을 잘라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이때 펠리오의 눈에 띄어 프랑스로 옮겨졌다.
오타니는 영국 런던에 유학했다가 불교의 일본 전래 루트에 관심을 품고 중앙아시아 탐험에 나섰다. 1902년 영국을 떠난 일행 중 오타니 등 3명은 인도의 불교 유적을 조사하고 나머지 2명은 타림분지와 타클라마칸사막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왔다. 오타니는 부친의 뒤를 이어 교토 니시혼간지(西本願寺) 주지로 부임해서도 1908년과 1910년 탐험대를 파견해 유물을 수집했다. 그러나 정부나 박물관 등의 지원을 받은 서구의 탐험가들과 달리 사찰 재정에만 의존하던 오타니는 자금난에 시달리다가 상당수 유물을 구하라 후사노스케에 팔았다. 그는 광산 채굴권을 얻는 조건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에게 이 유물을 바쳤고, 이는 경복궁 수정전에 보관돼오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이 인수했다. 나머지는 일본 도쿄의 류코쿠대와 도쿄국립박물관, 중국의 뤼순박물관, 독일 베를린박물관, 인도 뉴델리박물관 등이 소장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 위원 등은 2007년 3월 오타니 컬렉션 반환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국회에 반환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으면서도 도둑질한 물건을 돌려주지 않는 것은 잘못이며, 해외의 우리 문화재를 되찾는 데도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부 전문가와 국립중앙박물관 측은 "중국이 반환을 요구하지 않는데도 우리가 나서서 돌려줄 이유가 없고, 현지의 기술적 여건 등이 문화재 보존에 적합하지 않다"며 반대하고 있다. 오타니 컬렉션의 상당수는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에 있던 것인데, 이곳 주민들이 독립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중국 정부에 돌려주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문화재는 한 국가나 민족의 자존심과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어 나라 간 다툼의 빌미가 되기도 하고 우호를 북돋우기도 한다. 종교 문화재는 신앙의 대상이어서 더욱 민감한 영향을 미친다. 몽골 공룡화석은 부석사 관음상이나 오타니 컬렉션과 경우가 다르지만 한-몽골 합의가 이들을 둘러싼 분란의 해법에 힌트를 줄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문화재 보호 정신과 나라 간 선린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세계 각지에 흩어진 우리 문화재를 되찾아오는 데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지혜를 모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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