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사죄비 세운 일본인 아들이 편지 보내 "내가 바꿨다"
(천안=연합뉴스) 김용윤 김소연 기자 = 한 일본인이 자신의 아버지는 강제 징용 책임이 없다며 충남 천안시 국립 망향의동산에 세워진 '일제 강제징용 사죄비'를 '위령비'로 무단 교체해 물의를 빚고 있다.
13일 충남 천안서북경찰서와 국립 망향의동산에 따르면 지난 11일 오후 망향의동산 무연고 유골 합장 묘역 내 일제 강제징용 사죄 표지석이 '위령비'라고 쓰여진 표지석으로 무단 교체된 것을 직원이 발견했다.
원래 있던 사죄비 표지석에 위령비라는 표지석을 덧댄 것이다.
위령비에는 한글로 '일본국, 후쿠오카현·요시다 유우토'라고 쓰여 있다.
경찰은 1983년 12월 사죄비를 세웠던 일본인 아들이 자신의 지인을 한국에 보내 표지석을 교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자신이 표지석을 바꿨다고 자처하는 일본인이 일본에서 망향의동산으로 국제우편을 보내왔기 문이다.
편지를 쓴 사람은 자신을 '1983년 이곳에 사죄비를 세운 일본인 요시다 유우토의 아들 요시다 에이지'라고 소개했다.
그는 A4 용지 2장 분량의 편지에 일본어와 한글로 "우리 아버지는 강제징용 책임이 없다. 사죄할 필요가 없다. 위령비가 마땅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애초 사죄비에는 아버지 이름이 '요시다 세이지'라고 쓰여 있지만, 원래 이름은 '요시다 유우토'다"라고 덧붙이고, 자신의 전화번호와 주소까지 적었다.
망향의동산은 지난 7일 편지를 받고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다가 지난 11일 담당직원이 휴가 후 복귀하면서 표지석 변경 사실을 확인하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무연고 유골 묘역에는 폐쇄회로(CC)TV가 없어 정확한 시점을 알 수는 없지만, 표지석 교체 시기가 지난달 말에서 이달 초 사이로 망향의동산은 추정했다.
'위령비'가 무단으로 덧붙여지기 전, 이 자리에는 요시다 세이지 명의의 '일본인의 사죄비'가 있었다.
'귀하들께서는 일본의 침략 전쟁 시 징용과 강제연행으로 강제노동의 굴욕과 고난에 가족과 고향 땅을 그리워하다가 귀중한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나는 징용과 강제연행을 실행 지휘한 일본인의 한사람으로서 비인도적 그 행위와 정신을 깊이 반성하여 이곳에 사죄하는 바입니다. 늙은 이 몸이 숨진 다음도 귀하들의 영혼 앞에서 두 손 모아 용서를 바랄 뿐입니다'는 내용이다.
요시다 세이지는 일제 침략 시 강제징용을 주도했던 인물로 알려졌다.
그는 나이가 들어 자신의 행동을 참회하는 내용의 자서전을 쓰기도 했다. 이 사죄비는 그의 자서전 인세로 세워졌다.
그는 1983년 사죄비가 세워질 때 행사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고 망향의동산은 설명했다.
망향의동산 관계자는 "요시다 세이지는 비석에서 자신을 징용대장으로 칭하며 자신의 행동을 참회했지만, 일본에서는 그를 거짓말쟁이로 여기는 것으로 안다"며 "유족들은 그가 징용에 가담했다는 자체부터 전면 부정하며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고 설명했다.
요시다 에이지와 실제 표지석을 바꾼 일본인 지인 등 이 사건과 관련된 일본인은 현재 모두 일본에 있는 상태다.
그러나 망향의동산은 최소한 한 명 이상의 한국인 조력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천안에서 석재 가공을 하는 한 전문가는 덧대진 위령비 표지석에 대해 "국내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며 "하지만 천안에서 이 표지석을 만들 수 있는 곳은 없다"고 전했다.
경찰은 표지석을 바꾼 사람이 공용물건 손상 혐의가 있다고 보고 수사하고 있지만, 일본에서 살고 있어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외국인이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를 경우 형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다"며 "경찰서에 출석해 조사를 받으라고 하겠지만,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적극적인 대처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망향의동산은 조만간 덧붙여진 '위령비' 비석을 깨 원상 복구할 방침이다.
천안시 서북부 성거읍 소재 망향의동산은 일제 강점기 고국을 떠나 망국의 서러움과 고난 속에서 고향을 그리며 숨진 재일동포를 비롯한 해외동포의 안식을 위한 국립묘지로, 1976년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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