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상선, PSA 매각 터미널에 비싼 하역료 지불…자체 터미널 확보도 막혀
"농부 흉년에도 '씨나락'은 팔지 않아, 정책실패 다신 없어야"
(부산=연합뉴스) 이영희 기자 = 현대상선과 싱가포르의 다국적터미널 운영사인 PSA 간 부산신항 하역료를 둘러싼 갈등은 지난해 국적선사 구조조정 과정에서 비롯됐다.
짧은 기간 내에 자구안을 내놓으라는 금융당국과 채권단의 강요에 다급해진 현대상선은 모항 역할을 하던 부산신항 4부두 운영사 HPNT의 지분 50%+1주 가운데 40%+1주를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세계 각국에서 터미널을 운영하는 PSA에 800억원에 매각했다.
이 운영사의 이름은 PSA HPNT로 바뀌었다. 당시 매각금액을 두고 '자산가치에 비춰 너무 헐값'이라는 지적이 일었다.
최근 PSA가 ㈜한진으로부터 4부두와 비슷한 규모의 신항 1부두 운영사 PNIT의 지분 40%를 1천150억원에 사들인 점으로 미뤄 헐값 매각 지적은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25일 해운업계 등에 따르면 계약 과정에서 PSA는 현대상선의 다급한 사정을 이용해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을 내세워 관철했다.
현대상선이 '독소조항'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2023년까지 매년 최소 20피트 컨테이너 70만개를 무조건 PSA HPNT에서 처리하고 이를 초과하는 물량도 전부 이 터미널에서 처리해야 한다.
다른 터미널에 비해 높은 수준이었던 하역료를 유지한 채 해마다 일정 비율로 올려줘야 한다.
한진해운 청산으로 환적화물이 이탈하고 해운동맹이 4개에서 3개로 줄어드는 바람에 터미널 간 물량유치 경쟁이 심해져 하역료가 전반적으로 하락했음에도 현대상선은 비싼 하역료를 PSA 측에 지불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다른 터미널을 이용하는 경쟁 외국선사보다 연간 300억원대, 6년간 2천억원대의 하역료를 추가로 내야 하는 실정이라는 게 현대상선의 주장이다.
PSA는 현대상선이 부산은 물론 광양항에서도 터미널을 인수할 수 없도록 못 박았다.
달리 하역료 부담을 줄일 길이 없는 현대상선은 PSA 측이 하역료를 낮춰주지 않는 한 부산항 물동량을 늘릴수록 손해를 보는 처지에 놓였다고 말한다.
"너무나 불리한 독소조항들이지만 당시로서는 조속히 자구안을 마련해야 하는 다급한 사정 때문에 PSA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계약 직후 이런 조건들이 알려지자 전문가들은 심각한 후유증을 우려했고, 현실로 나타났다.
한 전문가는 "통상 터미널을 인수할 때에는 투자금을 회수하는 데 필요한 물량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다양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현대상선이 맺은 계약은 그 정도가 심했다"며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현대상선이 경쟁력을 키우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전문가는 "원양선사의 가장 중요한 경쟁 요소 가운데 하나가 화물을 안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모항의 자체 터미널인데 서둘러 매각해 버리는 실책을 범했다"며 "해운산업의 특성에 무지한 정책당국의 금융논리만 앞세운 정책 결과로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특히 현대상선의 지분을 국내자본이 아닌 외국자본이 인수하도록 한 것은 더 큰 실책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당시 부산항만공사가 "헐값에 외국자본에 넘기는 대신 공사가 인수했다가 나중에 현대상선이 안정되면 다시 매입할 수 있게 하자"며 인수하려 했으나 정부가 가로막았다.
지분 전체를 인수하는 대신 10~20%라도 인수해 일정 부분 경영에 개입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도 묵살했다.
현대상선은 우선 PSA와 협상을 통해 하역료를 다른 선사와 비슷한 수준으로 조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동남아 물량을 더 많이 늘릴 수 있다"며 "많은 물량을 PSA터미널에서 처리하는 대신 하역료를 낮춰 상생할 방안을 찾자는 제안을 했지만 뚜렷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전했다.
현대상선은 PSA 측이 하역료 인하를 끝내 거부하면 하역료가 절반 수준인 대만이나 중국으로 환적화물을 대거 이전하는 극단적인 방안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외국 항만으로 물량을 이전하면 사무실과 인력을 추가로 확보해야 하는 등 부담이 있지만 PSA터미널에 추가로 지급해야 하는 하역료보다는 훨씬 적게 든다고 현대상선은 설명했다.
환적화물 이전이 실행된다면 부산항은 물론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다.
현대상선 물량 의존도가 높은 PSA HPNT에도 타격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국가기반시설이자 전략자산인 항만 터미널을 외국자본에 넘겨주면 우리 정부와 항만공사의 정책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문제가 있다.
현대상선의 HPNT 지분을 항만공사를 중심으로 한 국내자본이 인수했더라면 지금 같은 갈등은 없을 수도 있다.
국적선사 육성을 위해 하역료 인하조정 등 다양한 상생방안을 마련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농부는 아무리 흉년이 들어 어려워도 내년 농사를 위해 '씨나락'은 팔지 않는 법인데 우리는 가장 소중한 영업자산의 하나인 터미널을 그것도 외국자본 손에 넘기는 우를 범했다"고 후회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가 하역료 때문에 환적화물을 외국으로 이전하면 공적자금을 지원받는 회사가 자기만 살겠다고 부산항과 국가경제의 어려움을 외면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만 지금 같은 하역료 구조로는 도저히 외국선사와 경쟁할 수 없는 만큼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국적선사를 살리겠다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벌어진 터미널 매각에 발목이 잡힌 현대상선과 투자금을 회수해야 하는 PSA가 상생방안을 찾을지, 끝내 서로의 주장을 고집해 최대 국적선사가 하역료를 이유로 부산항을 떠나는 사태가 벌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lyh9502@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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