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재작년에 동경녀자의학뎐문학교를 졸업하야 조선에 처음으로 녀의(女醫)가 된 허영숙 녀사는 이번에 서대문뎡 일뎡목에 녀의원을 내이고 금일부터 개업을 한다는데 병원 일훔은 영혜의원(英惠醫院)이라 하며 이로써 조선녀자가 의원을 개업하기는 처음이라 하겟더라." ('허영숙 여사 개업' 동아일보 1920. 5. 1.)
1918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의사시험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합격한 허영숙이 1920년 5월1일 서울 서대문정 1정목 9번지, 즉 서대문 1가 9번지에 의원을 열었다. 주로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산부인과, 내과, 소아과 등을 진료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개업 의원이다.
허영숙은 국내 의사 면허를 받은 첫 번째 여성이다. 의사시험에 합격한 첫 여성이자 국내 여성 개업의 1호이다. 전공은 산부인과였다. 그러니 여성 산부인과 전문의 1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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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혜의원은 5년 후인 1925년 5월6일 규모를 확장해 한성의원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병원 위치는 그대로인데 이번에는 개성병원 출신의 김기영이라는 의사와 함께 개업했다.
그러다가 1938년 5월31일 효자동 175번지에 해산전문병원 허영숙산원을 열었다. 신문에는 "허영숙씨(여의) 효자정 175번지에 해산전문병원 산원을 개원"(동아일보 1938. 5. 31.)이라는 광고가 실렸다. 광고를 보면 '조선온돌 산실 완비'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온돌방 입원실이 30실 정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잡지 월간 '여성'의 기자로 일하던 시인 노천명은 다음과 같은 탐방 기사를 썼다.
"효자동 가는 전차를 타고 진명고녀 앞에서 내려 들어가노라면 삼분을 채 못 걸어 바로 길가에 유난히 눈에 띄는 아담한 순조선식 큰 건물 하나가 있다. 살림집으로는 지나치게 크고 그렇다고 무슨 공무를 보는 집으로는 맞지 않게 아늑하고 다정한 맛을 주는 여기가 허영숙씨가 새로 개업한 씨의 산원이다… 이 산원의 특징은 조선식 온돌방에서 생활하고 또 이 온돌 따뜻한 방에서 해산을 해온 조선부인들이 병원엘 갑재기 들어가 침대 우에서 느끼던 종래의 불편을 일소하기 위해서 여기는 순조선식의 좋은 점을 살려가지고 우리 부인들에게 맞게 설비한 점이라고 한다…" ('허영숙산원 탐방기' 여성 1938. 12.)
노천명의 기사에 따르면 허영숙은 개업하고 있다가 3년 전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도쿄 적십자산원에서 공부를 하고 1937년 6월에 돌아와 8월부터 이 산원 건축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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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서울에서 출생한 허영숙은 진명소학교와 관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18년 학교 부속병원에서 실습하던 중 각혈로 병원을 찾아온 조선 청년을 만났다. 그가 바로 이광수였다. 이광수가 와세다대학교에 재학하며 소설 '무정'을 발표한 뒤였다. 이광수는 폐결핵으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는데 허영숙의 극진한 간호로 소생했다고 한다.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광수는 이를 전달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도산 안창호를 만나 독립운동에 동참하기로 하고 여운형이 조직한 신한청년당에 들어갔다. 또한,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기관지 독립신문사의 사장을 맡았다. 그러나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1921년 3월 귀국, 허영숙과 결혼했다.
이광수는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허영숙은 1925년 학예부장으로 일하던 이광수가 병으로 눕게 되자 대신 원고정리를 해줄 생각으로 신문사에 나갔다가 기자가 됐다. 그해 12월에는 남편으로부터 학예부장 자리를 이어받아 신문 사상 첫 여성부장이 되어 일하다 1927년 3월 퇴사, 의사 본업으로 돌아갔다.
기자 허영숙은 전문분야를 살려 의학상식, 육아, 가정 등에 관한 기사를 썼다. 1926년 3월1일부터 6일까지 6회에 걸쳐 연재한 '가정위생'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어린아이 울 때 어머니의 주의,' '해산과 위험,' '아이를 못 낳는 부인과 남편' 등의 기사가 실렸다.
첨단을 걷는 신여성으로서 여성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주장을 폈다. 인습을 타파하고 여성의 권익향상과 사회참여를 독려했다. 예컨대 '부인문제의 일면-남자 할 일, 여자 할 일'(1926.1.1), '남자가 여자로=여자가 남자로' (1922.1.2) 같은 기사를 남겼다. 기자가 되기 전에도 수차례 신문에 기고했는데, 성병에 걸린 사람은 법으로 혼인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기고문 '화류병자의 혼인을 금할 일'(동아일보 1920년 5월10일)은 한동안 논란을 빚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이광수가 납북되고 혼자서 세 자녀를 기른 허영숙은 말년에 자녀들이 사는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1971년 75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떠났다. 1975년 5월 춘원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폐렴에 당뇨와 동맥경화증까지 겹쳐 그해 9월8일 사망했다. 허영숙은 3년에 걸쳐 이광수의 유고를 정리하고 자료를 수집해 1963년 20권에 달하는 춘원 전집을 완성시키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는 박에스터이다. 본명은 김점동으로 1879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에서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윌리엄 홀과 로제타 셔우드 홀 부부의 통역과 간호 보조 일을 하다가 이들의 도움으로 1895년 도미, 다음 해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했다. 1900년 의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보구여관에서 3년간 진료했으며 1906년 평양 광혜여원(기홀병원)으로 옮겨 일했다. 평안도, 황해도 일대를 순회, 무료진료를 베풀었으며 평양에 맹아학교와 간호학교를 설립하는데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과중한 업무로 인한 폐결핵과 영양실조로 1910년 31세로 사망했다.
허영숙은 두 번째 여의사이자 최초의 여성 개업의였다. 그러나 정작 의사로서 보다는 이광수의 부인으로 더 알려졌다. 이광수에 가려져 여의사로서의 활약이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는 점은 아쉽다.
이후 유영준, 현덕신, 한소제 등의 여의사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개업의가 되기도 하고 의료활동 외에 여성운동, 독립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현재 우리나라 여자의사의 수는 2만명을 훌쩍 넘는다. 2017년 2월 현재 대한의사협회에 신고를 필한 의사는 10만1천618명이다. 이중 여자의사는 2만3천929명으로 23.9%를 차지한다. 박에스터가 의사가 된 1900년에는 이러한 성장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여성의 인권이나 여성 건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던 개화기. 당시 여의사는 단순한 전문직 이상이었다. 현재 당연한 것으로 누리고 있는 생활 조건들이 이들 선각 여성들의 치열한 삶에 힘입었음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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