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여성 중심으로 페미니즘 관심 높아지고 여성 안전대책 쏟아져
전문가 "여성혐오범죄 존재 인정해야…젠더 감수성 높일 교육 필요"
(서울=연합뉴스) 현혜란 기자 = '여성 안심 화장실. 첨단 비상벨 시스템 작동 중. 이 구역은 서초경찰서 특별순찰 구역입니다.'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400m가량 떨어진 3층짜리 건물 내부 화장실 앞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 지난해 5월 17일 새벽 1시 일면식도 없는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의해 한 여성이 무참히 살해된 곳이다. 당시 피해자는 23살이었다.
이 사건이 커다란 파장을 몰고 온 이른바 '강남역 살인 사건'이다. 범인은 경찰에서 "여성에게 자꾸 무시를 당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그는 법정에서도 같은 진술을 반복했다.
경찰과 검찰은 그를 조현병 환자로 판단했다. 그는 대법원에서 징역 30년 확정판결을 받았다.
2015년 기준으로 하루 평균 약 2.5건의 살인 범죄가 발생했지만, 이 사건이 사회에 미친 파장은 컸다.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한밤중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휘황찬란한 조명이 곳곳을 밝히는 대표적 유흥가에서 여성이 '묻지 마 범죄'에 변을 당하자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공포감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여성들은 길거리로 나와 사건을 '여성살인(페미사이드·femicide)'으로 규정하고서 집단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건 직후 강남역 9번과 10번 출구는 추모 포스트잇으로 뒤덮였다. 서울 여성가족재단은 이러한 추모자료를 서울여성플라자 성평등도서관에 전시했다.
성평등도서관에는 추모자료를 보러온 젊은 여성의 발길이 늘어났다.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페미니즘 단체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사건 발생일부터 1년 사이 교보문고에서 팔린 페미니즘 관련 도서는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3.7배 늘었다. 페미니즘 도서 구매자의 성별과 연령대를 분석해보면 20대 여성이 41.1%로 가장 많았다.
각종 여성단체는 사건 발생 1주기인 17일을 전후로 서울·대구·부산 등지에서 추모 문화제를 연다.
또 다른 주요한 변화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각종 여성 안전대책을 앞다퉈 내놓았다는 점이다.
공중 화장실 앞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거나 화장실 내부에 비상벨과 안심 거울을 달았다.
하지만 이는 대증요법일 뿐이라는 지적이 학계와 여성계, 시민사회단체 등을 중심으로 제기된다. 사회적으로 '여성혐오범죄'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은 채 대책만 만들다 보니 제2의 '강남역 살인사건'을 막는데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윤김지영 교수는 법원에서 여성혐오범죄라는 점이 인정되지 않은 점을 문제로 지적하면서 "그에 걸맞은 후속대책이 나올 리 만무하다"고 비판했다.
여성혐오범죄의 존재를 인정하고 처벌수위를 높인다면 사회적 인식을 바꿀 수 있다는 게 윤김 교수의 주장이다.
중앙대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도 "CCTV를 다는 건 단기적 대책일 뿐"이라며 "이번 사건의 기저에는 여성혐오라는 차별적 구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특히 수사기관이 조현병 환자의 범죄라는 것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여성혐오범죄라는 새로운 담론 자체를 차단해버렸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대책으로 젠더 감수성을 높여주는 교육을 일상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강남역 살인사건 범인과 같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자 주제에 감히 나를 무시했다'는 인식을 뿌리 뽑으려면 대학교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 성차별 구조를 무너뜨리는 교육을 체계화해야 한다고 이들은 강조했다.
run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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