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독일의 성공한 사업가이자 체스 명인 프리슈가 어느 날 오스트리아 빈의 별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그의 곁에는 군인 시절 쓰던 권총 한 자루가, 서재 책상 위에는 게임이 한창 복잡하게 진행된 듯한 체스보드가 놓여 있다.
이탈리아 작가 파올로 마우렌시그의 소설 '폰의 체스'(민음사)는 전형적 추리소설 형식으로 시작한다. 프리슈의 경력과 서재에서 발견된 체스보드는 그의 죽음이 체스를 둘러싼 광기와 관련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광기는 점차 나치 독일의 인종우월주의에 대한 집착과 겹쳐진다.
숨지기 며칠 전, 빈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체스 게임을 하던 프리슈에게 유대인 청년 마이어가 훈수를 두며 접근한다. 마이어는 선수가 잘못된 수를 놓으면 말을 거쳐 몸 전체에 전기가 흘러 쇼크를 일으키게 된다는 '죽음의 체스보드' 이야기를 꺼낸다. 프리슈는 죽음의 체스보드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고 말한다.
프리슈는 마이어에게서 체스보드 주인이라는 스승 타보리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아는 인물임을 직감한다. 프리슈는 나치 장교 출신이었다. 사실 타보리는 홀로코스트 수용소에서 자신에게 죽음 이상의 자괴감을 안겼던 수용소 소장을 찾기 위해 마이어를 보냈다. 작가는 소설 후반부에서 타보리의 수용소 시절 경험담을 통해 나치 독일의 광기를 고발한다.
수용소를 탈출하다 붙잡힌 타보리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총살을 면한다. 소장은 타보리와 체스를 두기 위해 그를 살려뒀다. 수감자들의 목숨이 판돈으로 내걸린 체스 게임에서 타보리는 두 번 패하는 바람에 24명의 수용자가 처형당했다.
"동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버텼다고 스스로를 속일 순 있어도, 신과 내 양심 앞에서는 내가 동포들의 목숨을 걸고 체스를 뒀다는 사실을 정당화할 수 없었다." 타보리는 수용소를 나온 이후 죽은 이들의 살던 동네를 찾아 용서를 구하며 복수를 다짐한다. 프리슈의 죽음은 70여 년 전 전쟁범죄에 대한 유죄 판결이자 복수의 결과였다.
소설은 화자와 시점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추리와 역사를 결합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수용자들을 체스의 말 대형으로 세워두고 총살할 만큼 잔혹했던 나치의 실상에 초점을 맞춘다. 작가는 나치 독일이 '아리안 체스'의 우수성을 찬양하며 체스를 유대인 박해의 도구로 썼다는 사실에 착안했다고 한다. 이승수 옮김. 252쪽. 1만3천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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