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몹쓸 기억력'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자신이 태어났을 때의 상황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테이프를 틀어놓고 자면 영어 단어가 무의식적으로 기억된다는 광고가 있다.
기억을 연구하는 캐나다 학자인 줄리아 쇼 영국 사우스뱅크대 범죄학 부교수는 이런 주장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단언한다.
'기억 오류', 즉 거짓 기억이 생겨나는 원리를 연구하는 쇼 교수는 신간 '몹쓸 기억력'(현암사 펴냄)에서 다양한 연구 사례를 소개하며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연구자들은 3.5세 이전의 일들은 성인기의 기억에서 사라진다고 본다. 세 살 이전에는 뇌의 구조가 미숙하고 인지능력과 이해력, 분별력이 부족해 뭘 기억하고 잊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기억은 분명 존재하지만 성인기까지 지속하지 못한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태어날 때를 기억한다는 사람들은 뭘까. 저자는 기억의 원리를 이용하면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믿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2006년 미국에서 이뤄진 한 연구에서는 어린 시절 디즈니랜드에 간 적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곳에서 미키마우스와 악수를 했음을 암시하는 광고를 읽게 했다. 광고를 읽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미키마우스와의 악수를 실제 경험으로 확신하는 비율이 높았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영국의 찰스 왕세자와 함께 차를 마시는 모습의 조작 사진을 보여줬더니 6세 아이 중 31%가, 10세 아이 중에서는 10%가 나중에 실제 자신이 왕세자와 차를 마셨다고 기억했다. 저자는 이런 연구 결과 등을 바탕으로 어린 시절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 심지어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도 큰 노력 없이 기억으로 지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수면 학습은 어떨까. 자는 동안 영어 테이프를 틀어놓으면 단어가 저절로 외워진다는 솔깃한 광고들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잠든 사이에 새롭고 복잡한 정보를 학습하거나 기억을 크게 강화할 수 있다는 가설을 뒷받침해줄 증거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소개한다.
최면도 마찬가지다. 최면술이 일부 의료적·심리적 문제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는 있지만 '기억의 과학'이란 관점에서는 최면이라는 것은 없다고 한다. 최면에 빠진다는 사람들은 거짓 기억을 만들어내기가 쉬운 사람들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요즘 흔한 무료체험 기회도 할 일을 기억하는 능력인 '미래계획기억'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꼭 잊지 않고 해지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불완전한 미래계획 기억으로 사람들은 무료체험 기간이 끝난 뒤에도 해지하지 않는다. 그럴 가능성은 무료체험 기간이 길수록 커진다.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기억을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새로운 사회 풍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조금이라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지금 일어나는 일뿐이다.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 우리 인생과 기억의 황금기는 바로 지금이다." 이영아 옮김. 352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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