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 22차례 언급…추념사 곳곳 '태극기' 써가며 이념갈등 해소 강조
'순국선열' '호국영령'과 함께 '민주열사' 병기…보훈정책 재정립 천명
'6·25' '한국전쟁' '북한' 언급 없어…북한과 대화의 끈 유지 포석
(서울=연합뉴스) 노효동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제62회 현충일 기념행사에서 낭독한 추념사를 관통하는 핵심어는 '애국'이었다.
A4 용지 넉 장 분량의 추념사를 12분에 걸쳐 읽어내려가는 동안 애국이라는 단어를 22차례나 언급했다. 지난 100년간 굴곡의 현대사 속에서 목숨을 버려가며 나라를 지켜온 국민의 애국심이 바로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새로운 대한민국의 '정신적 원동력'임을 강조하려는 뜻이 읽힌다.
문 대통령은 추념사 모두에서 "우리 국민의 애국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라며 "애국이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해냈다. 지나온 100년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주목할 대목은 문 대통령이 단순히 '애국' 그 자체를 강조하는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의 이념적 갈등과 정치적 편 가르기를 극복하고 치유하는 '중심화두'로 삼았다는 점이다.
문 대통령은 "애국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모든 것"이라며 "국가를 위해 헌신한 한분 한분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도 없고, 나누어지지도 않는 그 자체로 온전한 대한민국"이라고 역설했다.
특히 문 대통령은 '좌우' 진영을 모두 애국의 주체로 아울러 적시하는 탈(脫) 이념적 역사인식을 보여줬다.
애국을 마치 보수진영의 전유물인 것처럼 치부해온 사회 저변의 관행적 규정에 선을 그으면서, 우리 사회 민주화와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희생당한 진보 인사들과 산업화 과정에서 헌신한 파독 광부와 간호사, 봉제공장 여성 노동자 등 평범한 국민도 '애국자'였음을 명시하고 이를 추모와 존중의 대상으로 명시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애국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그 모두가 애국자였다"는 말로 애국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했다. 또 추념사 말미에 '순국선열' '호국영령'과 함께 '민주열사'를 나란히 열거했다.
추념사 곳곳에 '태극기'라는 단어가 통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어로 동원된 것도 이런 차원에서다.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가의 품속에 있던 태극기가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던 수많은 능선 위에서 펄럭였다"며 "파독 광부·간호사를 환송하던 태극기가 5·18과 6월 항쟁의 민주주의 현장을 지켰다"고 강조했다. 또 서해교전과 천안함 사건 등을 지칭하는 듯이 "서해 바다를 지킨 용사들과 그 유가족의 마음에 (태극기가) 새겨졌다"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정에서 태극기가 마치 보수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오도'됐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이는 진영과 이념을 넘어서는 애국의 표징이었다는 문 대통령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 대통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애국을 통치에 활용하는 구시대적 정치를 청산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애국을 이념적 코드로 이용하고 보훈정책을 정치화하면서 정치적 이득을 꾀하려고 했던 과거 일부 정권의 행태를 지적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기보다 전쟁의 경험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념의 정치, 편 가르기 정치를 청산하겠다"고 천명했다.
문 대통령이 이날 보훈정책의 '새틀짜기'를 선언하고 국민통합을 이끌어가는 '중심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특히 문 대통령은 국가보훈처의 위상을 장관급 기구로 격상하고 역할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보훈이야말로 국민통합을 이루고 강한 국가로 가는 길임을 분명히 선언한다"며 "국가를 위해 헌신하면 보상받고 반역자는 심판받는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식은 물론 정부조직 개편과 피우진 보훈처장 발탁에서 보여준 '보훈 행보'는 정치적 측면에서 대선과정에서 안보 불안감을 느껴온 중도와 합리적 보수층에 상당한 호소력을 가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문 대통령이 개혁·진보진영에 전통적 지지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과거 진보정권 때와는 달리 보훈정책을 국정의 주요기조로 내세우고 국가유공자들에 대한 지원을 대폭 확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점에서다.
한편, 문 대통령은 이날 추념사에 '한국전쟁'이나 '6·25전쟁' 등의 표현을 넣지 않았다. 또 '북한'에 대한 직접적 언급도 없었다.
문 대통령은 다만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는 동안 목숨을 바친 조국의 아들들이 있었다" "철원 '백마고지', 양구 '단장의 능선'과 '피의 능선', 이름 없던 산들이 용사들의 무덤이 되었다"는 등 한국전쟁을 간접적으로 연상케 하는 단어들만 썼다.
이를 두고 문재인 정부가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압박 흐름에 동참하면서도 북한과의 대화의 여지를 열어두려는 포석이라는 풀이가 나오고 있다.
역대 대통령들은 남북관계의 '온도'에 따라 현충일 추념사에 '6·25 전쟁'이라는 표현을 넣기도 하고, 빼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매년 현충일 추념사마다 6·25를 넣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남북이 개성공단 관련 협의를 위해 접촉을 추진하던 2009년 현충일 때 6·25 표현을 뺐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남북이 제12차 경제협력추인위원회 회의를 진행하던 2006년 현충일 추념사에서 6·25전쟁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rhd@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