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항쟁 30주년] 넥타이부대가 이끈 시민혁명…촛불집회 모태

입력 2017-06-07 16:00   수정 2017-06-07 16:03

[6·10항쟁 30주년] 넥타이부대가 이끈 시민혁명…촛불집회 모태

박정희 사망 이후 민주화 열기…군사정권 탄압 속에도 싹 틔워

박종철군 사망이 도화선…이한열 사망으로 민주화 열기 고조

'경적시위' '넥타이부대' 등 시민 참여…직선제 개헌 이뤄내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4개월여간 계속된 촛불집회로 시민들이 박근혜 정부를 무너뜨린 2017년은 공교롭게도 6월 항쟁 30주년이 되는 해다.

정부 비리 폭로로 촉발된 열기가 시민들을 결집, 평화적 수단으로 정치적 변화를 끌어냈다는 점에서 6월 항쟁은 명실상부 촛불집회의 '모태'라 할 만하다.

1960년 4·19혁명, 1987년 6월항쟁, 2017년 촛불집회로 이어지는 '시민혁명'의 한 축인 6월항쟁은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를 만든 분수령 중 하나였다.

◇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불 댕긴 6월항쟁

10월 유신으로 종신 집권할 것만 같았던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당하자 시민들은 비로소 민주화가 찾아오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광주에서는 시민들이 계엄군에게 무참히 학살당했다. 학살의 주범 전두환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이런 어둠 속에서도 민주화의 싹이 트고 있었다.

노동현장에서는 학생운동 세력과 노동자들이 결합한 노학연대가 이뤄졌고, 대중노선을 지향하는 진보적 청년들이 공개 정치투쟁 조직에 나섰다. 각 대학에서는 관제기구 성격이 강했던 학도호국단 대신 총학생회가 속속 부활하기 시작했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은 이런 밑바탕 위에 던져진 결정적 불씨였다.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조사받던 그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2단짜리 사회면 신문기사로 어렵게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공식 발표를 내 사건을 돌연사로 위장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경찰 자체 조사를 거쳐 고문 경찰관 2명이 구속됐고,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이 경질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해 2∼3월 전국 각지에서 박씨의 죽음을 추모하는 집회가 잇따랐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날로 거세어져 갔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그해 4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해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시 국민들의 요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를 대통령 직선제로 바꾸는 헌법 개정이었다. 그러나 호헌조치는 '헌법을 보호하다(護憲)'라는 자구적 의미처럼 개헌 논의를 유보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뜻이었다.

종교계와 학계 등 각계에서 호헌조치를 비판하는 시국선언이 잇따랐다. 한국 내 반미운동을 통제할 필요성을 느낀 미국에서도 상원 외교위원회가 호헌조치 재고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럼에도 정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던 박종철씨 고문치사사건이 다시 정국에 불을 댕겼다. 5월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 민주항쟁 제7주기 미사'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사건 진상이 조작됐다'고 폭로했다.

앞서 구속된 경찰관 2명은 희생양이었을 뿐 박씨를 직접 고문해 숨지게 한 경찰관들은 따로 있었고, 사건 은폐·축소 조작에 당시 치안본부장 등 경찰 고위급까지 연루됐다는 충격적 내용이었다.

이런 사실은 당시 구속된 경찰관 2명과 같은 교도소에 수감됐던 이부영 전 의원이 교도소 안에서 알게 된 내용을 편지로 기록한 뒤 교도관 협조를 받아 김수환 추기경과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 폭로로 사건 조작을 주도한 경찰관들이 줄줄이 검찰에 구속됐고,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도 1년 후 구속됐다. 그 사이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재야운동 세력은 6월10일 대규모 정부 규탄대회를 계획했다. 야당·종교계·재야단체 인사들이 모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중심축이었다.

◇ 이한열 사망으로 민주화 열기 고조…직선제 개헌 이뤄내

6·10 대회를 하루 앞둔 6월 9일, 또 하나의 불씨가 여론에 불을 지폈다. 학교 앞 시위에 참가한 연세대생 이한열씨가 경찰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진 사실이 생생한 사진과 함께 언론에 보도됐다. 이씨는 한 달 후인 7월5일 사망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국민운동본부는 6월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경찰 봉쇄를 뚫고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ㆍ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시위는 날이 갈수록 격렬해졌고, 운전자들의 '경적시위', 양복과 넥타이 차림 회사원들로 이뤄진 '넥타이부대'까지 거리로 나와 세를 불렸다.

18일에는 최대 인파인 150만여명(국민운동본부 측 집계)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26일에는 전국 37개 도시에서 열린 평화대행진 시위에서 3천467명이 경찰에 연행됐지만, 민주화를 향한 시민들의 열기는 사그라질 줄 몰랐다.

여당인 민정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노태우 대표위원은 결국 6월29일 6·29선언을 발표한다.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개헌하고, 야권 지도자인 김대중씨를 사면·복권한다는 내용 등이 담겨 국민의 뜻을 일정 부분 받아들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정작 대선에서는 야권 분열사태로 신군부 세력인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돼 진정한 의미의 '정권교체'를 이뤄내지는 못했다. 이는 6월항쟁의 의미를 따질 때 대표적인 한계로 언급되곤 한다.

그럼에도 30여년간 계속된 군사독재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고, 국민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는 정치적 변혁을 이뤄내 문민 통치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6월항쟁이 갖는 현대사적 의미는 매우 큰 것으로 평가된다.

6월항쟁에 참가한 이들은 30년이 지난 지금 중년층이 돼 한국사회의 허리를 구성하고 있다. 생활인으로 살던 이들은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지자 '아이들에게 부끄럽다'며 다시 한 번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었다.




puls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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