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덜 받은 희생자들, 묘지 관리비 체납 명단에
문익환·김근태·전태일·박종철 등 묻힌 '민주화운동의 성지'
(남양주=연합뉴스) 권숙희 기자 = 문익환 목사,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전태일 노동운동가, 박종철 민주운동가, 용산참사 희생자들…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의 희생자들이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 함께 잠들어 있다.
6월항쟁 30주년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지난 8일 연합뉴스는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성지가 된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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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설묘지 관리비 체납 수두룩…지원 '절실'
"위 묘소는 관리비가 미납되었습니다. 묘지 관리에 어려움이 있사오니 조속히 납부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민주화 열사 등 160여명이 묻혀 있는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곳곳에는 모란공원관리소장 명의의 이 같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정부나 지자체가 관리·지원하는 곳이 아닌 사설 묘지이다보니 유가족 개인이 비용을 모두 부담해야 한다.
이러한 사정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열사 일부를 제외하고는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백만원까지 한해 8만4천원인 관리비를 내지 않아 '딱지'가 붙은 것이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삶 속에서 투쟁을 벌이다 희생된 이들이었기에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또 남양주시 지역모임인 '모란공원을 사랑하는 사람들'에서 매주 묘역 관리 봉사활동을 해주긴 하지만, 역부족인지 잡풀이 무성하고 방치된 묘지도 잇따라 눈에 띄었다.
모란공원을 사랑하는 사람들에서 활동하는 김기문씨는 "시민사회에서 말하는 열사들과 국가가 인정한 열사의 수가 너무나도 차이가 난다"면서 "이분들이 최소한의 지원이라도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달에 처음으로 모란공원 관리사무소에서 문경희 경기도의원, 남양주시청 관계자 등과 함께 모여 이분들을 법적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논의했다"며 "아직 구체적인 결론은 얻지 못했지만,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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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년 내내 추모제 열리는 '민주화운동의 성지'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슬픔이 서린 얼굴들을 마주하게 된다.
새 꽃바구니가 눈에 띄어 숭실대생 박래전 열사(당시 25세)의 묘지 앞에서 발길이 멈췄다.
지난 6일이 29주기이던 박 열사의 묘지 앞 꽃바구니에는 '래전아, 문재인 대통령이 네 이름 부르시는 거 들었지! 우리 만날 때까지 열심히 잘 살자'고 적힌 메모가 꽂혀 있었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광주는 살아있다'고 외치며 분신한 박씨를 호명한 바 있다.
머리에는 '단결 투쟁' 머리띠가 묶여 있고 앞에는 '크림빵'이 놓여 있는 전태일 열사(당시 22세)의 동상.
종류별 세월호 리본이 담겨 있는 박종철 열사(당시 23세)의 묘지 앞 유리상자.
또 늦봄 문익환 목사,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 전태일 평전을 펴낸 조영래 변호사, 용산참사 희생자, 삼성전자 노동자 등이 이곳을 함께 지키고 있다.
이들 외에도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가 이삼십대에 짧은 생을 마감한 이들의 묘지들도 줄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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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서울서 떠밀려 전태일 열사 안장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 등에 따르면 1970년 11월 18일 전태일 열사의 유해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공원묘지인 모란공원에 안장되면서 민족민주열사묘역의 역사는 시작됐다.
전태일 열사보다 한 해 앞서 1969년 11월 5일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사형 당한 권재혁 선생의 유해가 묻혔지만, 이는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당시 보안 당국에서 전태일 열사의 묘가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외곽에 있길 종용하는 바람에 모란공원까지 오게 된 것이 시작이 됐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고 이소선 여사는 "새 공동묘지라서 다른 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고 한다.
이후 1971년 5월 노동조합 활동 중 살해된 김진수 열사, 1973년 10월 안기부의 고문으로 사망한 최종길 열사가 이어서 안장됐다.
그러나 모란공원이 본격적으로 열사들의 안식처가 된 것은 1986년 4월 박영진 열사의 장례 투쟁이 때였다.
민주화운동의 화신이 서울에서 벗어나 잠들길 바랐던 정권이 이젠 여러 열사가 한데 모이는 것을 막으려고 나선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따르다가 숨진 박영진 열사의 유해는 한 달 열흘간의 투쟁 끝에야 이곳에 안장됐다.
이때부터 노동운동, 학생운동, 의문사, 산업재해 등으로 희생된 이들이 묻히는 민족민주열사모역이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 관계자는 "정부의 개입 없이 민간 주도로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열사 묘역이 생긴 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일"이라고 강조했다.
suk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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