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역사 2cm] 조선 왕실 보고누락으로 군 수뇌부 모조리 숙청됐다

입력 2017-06-14 11:42  

[숨은 역사 2cm] 조선 왕실 보고누락으로 군 수뇌부 모조리 숙청됐다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군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발사대 4기를 추가로 배치하고도 청와대에 보고하지 않아 후폭풍에 휩싸였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진상 조사에 나서 위승호(육사 38기·중장) 국방정책실장이 추가 배치 문구를 보고서에서 삭제하도록 지시한 사실을 밝혀내고 위 실장을 한직으로 내쫓았다.

군은 사드를 배치하면서 환경영향평가를 회피하려고 꼼수를 부린 정황도 청와대 조사에서 드러났다.






보고누락 의도와 환경영향평가 회피 책임자 등을 밝히려는 조사가 진행되고 있어 파문 확산은 불가피하다.

청와대는 조사 결과를 토대로 군 수뇌부 물갈이를 포함한 대대적인 군 개혁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의 첫 번째 국방부 장관으로 송영무 전 해군참모총장을 내정한 것이 인적 쇄신 신호탄이다.

육군이 독점하다시피 해온 국방부 장관직에 해군 출신을 기용한 것은 참여정부 시절 윤광웅 전 장관 이후 13년 만에 처음이다.

337년 전 조선 숙종 때도 보고누락으로 군 수뇌부가 모조리 숙청되는 일이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1680년 3월 영의정 허적(1610~1680년)의 집안 잔치에서 비롯됐다.






숙종은 잔치용 물품을 넉넉하게 지원하되 하객들이 비를 피할 수 있도록 기름칠을 한 왕실 천막(유악)도 보내주도록 한다.

권력 2인자인 영의정을 존중해 최대한 예우를 갖추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허적에 우호적이던 왕의 태도는 어느 순간에 돌변한다.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유악을 허적이 사전 보고 없이 가져간 사실을 알고 "한명회도 감히 이런 짓을 하지 않았는데….”라며 분통을 터트린다.

두 딸을 예종과 성종 왕비로 둔 한명회(1415~1487)는 인사권과 군사권을 모두 장악한 조선 최고 실력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숙종이 격분한 것은 영의정이 조정과 군부 요직을 독차지한 남인 세력을 믿고 왕을 업신여겨 보고를 누락했다는 판단에서다.

숙종의 후속 조치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고 과감했다.

잔칫집에서 흥을 한창 즐기던 훈련대장과 총융사, 수어사를 궁궐로 불러들여 관직을 박탈하고서 후임에 서인을 앉힌다.

이들은 각각 한양과 북한산성,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군대의 지휘관이다.






문신 인사를 주관하는 이조판서도 경질한다.

남인이 장악한 인사권을 박탈해 주요 공직을 서인 중심으로 채우려는 의도에서다.

군부 숙청은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각본대로 이뤄진 듯하다.

보고누락은 남인 출신의 군 수뇌부를 일거에 바꾸기 위한 빌미였다.

숙종은 군부 요직을 물갈이하는 데 성공하자 영의정 허적을 비롯한 남인 계열의 고위 관료를 정조준한다.

왕실 물건에 함부로 손댄 허적을 꾸짖은 데 이어 자질까지 문제 삼았다.

잔칫집 손님이 온통 남인 일색이었다는 점을 거론하며 화합에 힘써야 할 정승이 되레 파벌을 조성했다고 비판했다.

모욕 주기 방식으로 우회 불신임을 피력하며 사퇴를 압박한 것이다.

식견이 넓고 성품이 온화한 허적은 치열한 당쟁 속에서도 극단적인 보복이나 갈등을 피하려고 노력했다고 자부했는데 졸지에 분열주의자로 몰리자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난다.

영의정 사임 후 나머지 남인 계열 관료들도 속전속결로 솎아낸다.

우찬성(종1품) 윤휴와 대사헌(검찰총장) 민암을 파면하고 귀양보내자는 상소가 접수되자 숙종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곧바로 허락한다.

이후 영의정, 좌의정,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 대사헌 등을 모두 서인이 차지한다.

정권 교체에 성공한 서인은 남인 세력을 꺾는 데 그치지 않고 학살극을 벌인다.

영의정 허적의 서자 허견이 역모를 꾸몄다는 고발장을 만들어 칼춤을 춘다.

허견이 인조 손자이자 인평대군 아들인 복창군·복선군·복평군 등 삼복 형제와 손잡고 왕을 몰아내려고 모의했고, 도체찰사부 군인들이 수차례 특수훈련을 했다는 게 고발 내용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전쟁에 대비해 만든 도체찰사부는 한양을 제외한 전국 8도 군사를 지휘하는 군사기구다.

도체찰사부는 당시 내분을 겪던 청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증강하고 훈련 강도를 높이는 등 북벌을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1636~1637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당한 굴욕을 되갚으려는 준비였지만 숙종은 도체찰사부 움직임을 늘 경계했다.

외종숙(5촌) 김석주를 도체찰사부 부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영의정 허적을 견제하기 위한 조처였다.

김석주는 훈련도감과 어영청을 도체찰사부 밑에 두려던 허적의 계획도 무산시켜버린다.

궁궐 경비부대인 어영청은 수도방위사령부 격인 훈련도감과 함께 최정예 부대다.

김석주는 허적을 포함한 남인 계열 인사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 감시했다.

심복인 정원로 등에게 미행을 시켜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발언이나 행동이 발견되면 보고하도록 한 것이다.

잦은 병치레로 권력을 빼앗길 수 있다고 불안해하던 숙종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아버지 현종이 예송논쟁에 휩싸여 신하들에게 끌려다녔다는 숙종의 기억도 남인 견제 의지를 굳힌 배경이다.

예송논쟁은 왕실 장례 때 상복 착용 기간을 놓고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맞붙은 권력투쟁이다.

숙종이 14살에 즉위하자마자 이례적으로 친정을 펼친 것은 왕권 강화 차원이었다.

조선 시대는 어려서 왕이 되면 20세까지 모후(임금 어머니)나 대비(선왕 부인)가 대리통치를 하는 게 관행이었다.

숙종은 삼복형제가 역모를 꾸몄다는 고발장을 읽자마자 남인을 무력화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다.

김석주 심복들이 오랫동안 남인 세력의 동태를 염탐해서 보고한 정보를 토대로 고발장이 작성됐다.

고발장을 보면 1679년 1월 허견이 복선군을 만나 "젊은 왕이 자주 아프고 세자가 없으니 불행한 사태가 생기면 대감이 임금 자리를 맡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복선군은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허견은 평소에도 말썽꾼이었다.

상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싸움질을 했고, 처형과 언쟁을 벌이다가 주먹을 휘둘러 치아를 부러뜨리기도 했다.

폭행당한 처형은 숙종 외조부의 첩이어서 허견이 엄벌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왕의 선처 덕에 경징계 처분을 받는다.

역모 고발장이 접수됐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숙종은 주요 관리들을 서둘러 입궐시켜 살생부를 작성하게 한다.

의금부 도사들은 역모에 연루됐다는 남인들을 모조리 잡아와 고문하고 처형했다.

허견과 삼복 형제들은 귀양 갔다가 처형된다.

허적은 아들의 역모를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판명돼 화를 피하는 듯했으나 불과 1개월도 안 돼 사약을 받아 마신다.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한다.

당파 간 견제와 균형을 바탕으로 한 공존 정치체제가 사라지고 특정 세력이 권력을 싹쓸이하는 현상은 이때부터 나타났다.

죽기살기식 권력투쟁이 가열되면서 진실은 왜곡되고 거짓과 조작이 기승을 부린다.

일례로 1682년 허새와 허영, 유명견 등이 반역 모의를 한 혐의로 잔인하게 처형된 것은 남인의 씨를 말리려는 서인의 모함 때문이었다.

숙종은 정파 간 권력투쟁을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왕권을 누렸으나 무수한 인재가 목숨을 잃는 참사를 빚었다.

인품과 실력을 겸비한 윤증(1629~1714년)과 같은 선비들은 벼슬 자체를 아예 멀리했고 공직사회는 부정부패로 곪아 터졌다.

같은 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군 수뇌부를 일거에 숙청한 후유증은 심각했다.

훈련도감과 어영청 등 최정예 부대는 국가가 아닌 특정 세력에 충성한 탓에 군대는 오합지졸이 된다.






일제가 손쉽게 한반도를 강점한 것은 이때부터 군 기강이 무너진 탓이다.

참여정부에서도 청와대 허위보고 파문이 일었다.

2004년 서해 상 북방한계선(NLL)에서 우발 충돌을 막기 위한 교신방법에 남북이 합의한 지 약 한 달 만에 NLL을 넘어온 북한 경비정에 우리 초계함이 경고사격을 했다.

우리 해군은 북한 경비정이 거짓 내용을 일방적으로 송신한 데다 NLL까지 침범했기 때문에 경고사격을 했다고 청와대에 보고했다.

하지만 북한이 NLL 교신 합의를 어겼다고 강하게 반발하자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군이 허위보고를 한 것으로 의심하면서 진상 조사에 들어간다.

당시 조영길 국방부 장관은 일련의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박승춘 합참본부 정보본부장(육군 중장)은 경고사격 당시 진상을 일부 언론에 공개하고서 옷을 벗는다.

이에 청와대는 군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서 국방 지휘봉을 노무현 대통령의 고교 선배인 해군 출신 윤광웅 장관에게 넘긴다.

윤 장관은 취임 4개월 만인 2004년 11월 육군본부 압수수색을 지시한다.

육군 준장 진급인사가 비리로 얼룩졌다는 괴문서가 국방부 청사 앞에 뿌려지고 관련 첩보가 입수돼 본격 수사를 명령한 것이다.

군 검찰이 육군본부 심장부를 뒤진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어서 육군 장성들이 대거 구속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참여정부와 갈등을 빚은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을 찍어내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남 총장은 군 사법개혁과 충남 계룡대 대통령 별장 신축, 남북한 군사력 비교, 지역별 장군 진급 균형 등을 놓고 청와대 등과 사사건건 충돌했기 때문이다.

남 총장이 압수수색에 반발해 전역 지원서를 내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수사는 1년가량 진행됐으나 용두사미로 끝난다.

노무현 대통령은 남 총장 사의를 반려하면서 "적법한 수사를 보장하되 여론의 힘을 빌려 수사하는 관행은 적법하지 않다"며 군내 반발 기류를 서둘러 수습했다.

윤 장관은 국방 문민화와 방위사업청 개설 등 고강도 개혁을 추진했으나 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2005년 경기도 연천 총기 난사사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송영무 내정자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최대한 말을 아끼면서도 강군 육성 의지는 확실히 피력했다.

송 내정자는 한 언론사 통화에서 "군이 전쟁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을지 먼저 고민하겠다"고 밝혔다.

남북한 군사 대치 상황에서 강력한 군대 건설을 목표로 개혁 페달을 밟겠다는 복안은 환영할 일이다.

다만, 군대를 정권 방패막이로 삼은 조선 중후기 서인 세력과 치밀한 준비 없이 칼부터 휘두른 윤광웅 전 장관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개혁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다.

hadi@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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