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서울의 다섯 궁궐과 그 앞길'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세종 27년(1445) 6월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에 건장한 남성 360명이 모였다. 이들은 각 군영에 근무하는 무관직 하급관리들로 이날 체력 시험을 치렀다.
당시 광화문 앞에 쭉 뻗은 길인 육조대로(六曹大路)는 사방이 개방된 공간이었다. 대로에 모인 사람들은 군인들이 양손에 모래주머니 50근(약 3㎏)을 쥐고 힘겹게 100보(약 120m)를 달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15세기에 육조대로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려주는 사료는 남아 있지 않다. 20세기 초반에는 길이가 약 550m, 폭이 55∼58m였다. 조선의 도시 설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500∼600년 전에도 비슷한 규모였을 것이다.
김동욱 경기대 명예교수는 "육조대로는 조선시대에 구경꾼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이었다"며 "왕의 행렬이나 중국 사신들의 출입, 이런 행사에 수반돼 이뤄진 산대놀이가 도성민에게 개방됐다"고 말한다.
신간 '서울의 다섯 궁궐과 그 앞길'(집 펴냄)은 김 명예교수가 육조대로를 비롯해 조선시대 궁궐 앞에 있었던 길들을 소개한 책이다.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이유는 지금까지 궁궐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담장 안쪽에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궁궐 앞길은 궁궐과 도시를 연결하는 숨통과 같은 존재"라며 "담장 안과 밖을 아울러 살펴봐야 궁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경복궁과 함께 사실상 조선시대 법궁 역할을 한 창덕궁은 정문인 돈화문 앞 경관이 육조대로와는 차이가 났다. 돈화문 앞길은 폭이 25m를 넘지 않아서 웅장하지 않고 소략한 느낌을 줬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정조가 1785년 언급했던 말을 인용한다. 승정원일기에는 "대궐(창덕궁) 밖 길 좌우가 모두 초가집들이기 때문에 모양을 이루지 못했다. 경복궁 앞길은 육조와 백사(百司·모든 벼슬아치)가 좌우에 늘어서 있는 데다 규모가 반듯반듯하다"고 기록됐다.
창경궁 앞길은 경복궁, 창덕궁 앞길과 비교하면 구조가 전혀 달랐다. 지금도 광화문과 돈화문에서 보면 길이 앞으로 뻗어 있지만,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앞에는 길이 옆으로 나 있다.
저자는 "모름지기 궁궐의 정문 앞길은 앞으로 뻗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홍화문 앞에는 정원인 함춘원의 언덕이 가로막고 있었다"며 "홍화문은 문 앞에 놓이는 월대가 짧고 단출한 점도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이외에도 저자는 숙종과 영조가 즐겨 찾은 경희궁 흥화문 앞길, 고종이 근대화를 꿈꾸며 대한제국의 중심지로 정한 덕수궁 대한문 앞길의 역사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는 궁궐 앞길에 대해 "함부로 길을 넓히거나 큼직한 건물을 짓는 일을 피하고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고도 신중하게 다듬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364쪽. 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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