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기 입문서 '패러디'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전문)
정현종의 짧은 시를 박덕규는 이렇게 다시 썼다. "사람들 사이에/ 사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있고 싶었다//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사이' 전문)
정현종의 '섬'은 행복이나 문학, 혹은 각자 꿈꾸는 무엇으로 읽히는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시어다. 반면 박덕규의 '사이'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이분법적 시대상황을 풍자한다. 마지막 행은 1980년대 시위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현실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정끝별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는 최근 펴낸 시론서 '패러디'(모악)에서 두 시를 패러디 관계로 본다. 박덕규가 정현종의 '섬'을 대조적으로 패러디하며 두 텍스트 사이의 대화성을 강화시키고 반전효과를 높였다고 분석한다.
함민복이 패러디한 '섬'은 현실을 더 구체적으로 반영한다. 냉전과 분단 탓에 어정쩡하고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섬이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 섬이 있었다/ 나도 그 섬에 태어났다/ 북한과 남조선 사이에/ 섬이 있다/ 나도 그 섬에 가보았다" ('이북 5도민 회관에서' 부분)
시인은 일련의 패러디 텍스트들이 서로 의미를 보충하며 '혈연관계'를 맺는다고 설명한다. 패러디는 단순히 언어만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자체적인 사회·역사적 문맥을 갖는다는 것이다.
표절과 패러디의 차이는 뭘까. 원텍스트를 베끼고 따오고 바꾸면서 그 행위를 숨기느냐, 아니면 재의미화 자체를 즐기느냐다. 시인은 "패러디가 변용과 전복에 의한 창조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그저 '텍스트라는 실재에 기생'하며 그 기호화된 실재를 베끼고 따오고 바꾸기만 한다면, 패러디의 미래가 보장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1990년대 이후 우리 시에서 수많은 원텍스트의 파편들을 직조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내는 패러디의 실례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시인은 패러디를 "21세기를 사는 우리 시대의 중심 표현방법"이라고 말한다.
할리우드 영화와 불법 비디오 등 각종 영상 이미지를 뒤섞은 유하의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1995), 외국 시를 인용한 뒤 하고 싶은 말을 풀어놓은 이성복의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2003)을 보면 그렇다.
김수영·서정주·김춘수·김지하·오규원·황지우·김혜순 등 주요 시인들의 작품을 들어 패러디란 무엇인지, 패러디를 시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꼼꼼하게 설명한다. 시 쓰기 입문서 시리즈인 '시인수업' 다섯 번째 책. 112쪽. 6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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