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여성의 흑역사' 전혜린을 위한 변명

입력 2017-06-28 08:40  

'책 읽는 여성의 흑역사' 전혜린을 위한 변명

신간 '문학소녀'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영영 나는 구라파 사람이 될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예감도 있곤 한다. 구라파에 매혹되고 정복당하고 말 것 같은…… 독일의 비길 데 없는 이성과 선의에 가끔 지고 말 것 같은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수필가이자 번역가였던 전혜린(1934∼1965)은 유학생활을 한 독일 뮌헨의 슈바빙을 고향처럼 여겼다. 지인들에게 베르나르니 클레멘스 같은 외국 이름을 붙여 불렀고, 근대를 완성하지 못한 땅에서 포스트모던을 말했다.

이국을 향한 맹목에 가까운 동경, 유치한 지적 허영, 비범해지려는 혹은 그렇게 보이려는 강박적 노력, 과잉된 자의식, 현실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문학이라는 도구로 조국과 인류를 고민하는 이들은 그를 조소했다. 문학과 자신을 거의 동일시하면서도, 수필 말고는 변변한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는 이유도 있었다.

전혜린의 수필과 그가 번역한 '데미안', '생의 한가운데' 같은 외국문학은 1960∼1970년대 문학소녀들을 열광시켰다. 하지만 그들을 사로잡은 소녀감성은 철이 들면 벗어나고 극복해야 할 한때의 '흑역사'이기도 하다. 신간 '문학소녀'(반비)는 한국 문학판의 주류로부터 조롱받아온 전혜린과 그를 통해 문학에 빠져든 '소녀'들을 위한 애정 어린 변론이다.

미스터리 전문지 '미스테리아' 편집장인 저자 김용언은 출생부터 독일 유학과 이른 결혼, 귀국한 뒤 서른한 살에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요절하기까지 전혜린의 생애를 돌아본다. 조롱의 근거가 된 '문학소녀' 담론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추적하고 김명순·김원주·나혜석 등 과거 '여류' 문인들의 수난사도 상기한다.

전혜린은 일제강점기 고위직 경찰을 지내고 해방 이후에는 법조계 원로로 활동한 전봉덕의 장녀로 태어났다.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한국전쟁 때 부산에 임시 교정을 차린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지만 1955년 독일 뮌헨대로 유학했다. 그곳에서 결혼하고 딸을 낳았다.

해외여행은 꿈꾸기도 어렵던 시기의 이런 인생행로는 '부잣집 딸내미의 교양있는 공주 코스프레'라는 비아냥을 살 만했다. 하지만 저자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삶을 너무 빨리 맞닥뜨린 전혜린의 초조와 불안에 대해서는 왜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는지 묻는다. 그는 독일에서 번역·수필 원고료로 생활했고 돈이 떨어지면 이웃에게 돈을 빌리며 살았다.

"땀을 흘려라!/ 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노래로 듣고/ (…)/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3년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 쓴 이 시에는 문학장 안팎을 막론하고 전혜린 같은 '문학소녀'를 바라보는 주류 남성의 시선이 집약돼 있다.

이국 취향으로 따지면 '모더니즘의 기수'로 불리는 김기림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이미 1930년대에 서울을 묘사하며 '일류미네이션'이니 '데파트멘트'니 하는 영단어를 썼지만 전혜린만큼 논쟁과 비판의 대상이 되진 않았다.

'문학소녀'는 있는데 '문학소년'이라는 말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녀는 현모양처로 완성되는 과정에 있는 미성숙한 존재일 뿐이다. 현실과 픽션을 구분하고 거리를 설정하는 능력이 부족해 쉽게 문학에 쉽게 도취된다는 편견은 문학소녀뿐 아니라 성인 여성 작가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나 저자는 감정이입을 도구 삼아 문학으로 내면을 구성하는 감수성의 힘을 높이 산다.

"현실 세계에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지만 문학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고, 본질적으로는 평범했지만 생의 어떤 특정한 순간의 상황과 우연의 힘을 빌려 잠시 동안 특별할 수 있었던, 그리고 그 시절을 두고두고 추억하며 자기위안을 동력으로 삼는 수많은 사람들의 대표 명사로서 전혜린의 힘은 강력하다." 236쪽. 1만5천원.

dad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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