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갤러리서 이진용 개인전 '컨티뉴엄'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갤러리 안쪽으로 들어서면 수행자의 방처럼 보이는 공간과 만나게 된다. 오래된 석조 부조로 착각할만한 100여개 작품은 이진용 작가의 '활자' 시리즈다. 고슬고슬한 나발(부처상의 머리카락) 같은 입자들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다양한 한자 활자가 새겨져 있다.
'활자' 시리즈는 작가가 2014년부터 진행 중인 작업이다. 작가가 25년 전 중국에서 닥치는대로 사모은 수십만 점의 목판 활자가 재료가 됐다. 이제 중국에서는 '하늘 천'(天) 자도 하나 쉽사리 구할 수 없는 귀한 물건들이라고 했다. 작가는 목판 활자의 본을 뜬 다음 흙과 압축종이 등 온갖 재료를 섞어 만든 반죽으로 본을 채운다. 20여 일간 굳힌 판 위에 석분을 뿌리고 물로 살짝 헹구는 작업을 되풀이하다 보면 오래된 느낌의 활자가 탄생한다. 광을 내는 일까지 마쳐야 작가가 '조각그림'이라고 칭한 이 작업이 완성된다.
함께 전시된 '하드백'(책) 시리즈도 마찬가지로 엄청난 공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책장 한 장을 표현하는 선 하나를 긋는 데 많게는 7, 8시간이 걸린다. 이 때문에 일요일 하루를 제외하고는 주 6일 하루 3시간만 잠을 자면서 작업에 몰두한다. 부산의 작업실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는 '활자' 작업에 몰두하고,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는 '하드백' 작업을 하는 것이 작가의 일상이다. 자신도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짓"이라고 표현한 노동집약적인 작업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을 표현하고 싶으냐는 물음이 제일 싫다"는 작가는 28일 학고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어릴 적 사찰의 바위에 구멍이 파인 것을 관찰했던 경험을 꺼내 들었다.
"물 한 방울이 몇백 년간 바위에 떨어지고 떨어지면 결국 홈이 파이잖아요. 어마어마한 급류가 바위를 치면 깨뜨리기만 할 뿐 구멍을 낼 순 없습니다. 그렇게 꾸준히 쌓이고 쌓여 결국 구멍을 내고야 마는, 그 미세한 에너지가 주는 설렘이 좋습니다."
작가는 지난 3년을 돌아보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면서 같은 작업을 발전시켜 나갈 계획임을 밝혔다. 3년 '수행'의 결과인 223점이 출품되는 작가의 전시 '컨티뉴엄'은 30일부터 한 달간 계속된다. 미국 등에서 먼저 주목받았던 작가의 이번 전시는 영국의 폰톤 갤러리에서도 열린다. 문의는 ☎ 02-720-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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