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 450㎞ '정의 행진'에 민심 주목…"野, 처음으로 의제 설정 성공"
에르도안, 쿠데타 저지 1주년 '민주주의 감시' 집회로 맞불
(이스탄불=연합뉴스) 하채림 특파원 = 12·12 쿠데타 후 군사정권과 야권이 '민주주의'와 '정의사회'를 표방하며 대결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 쿠데타 1년을 맞은 터키에서 재현됐다.
1980년대 초반 한국과 다른 점이라면 터키 정권이 민주주의를, 야권이 정의를 외치는 구도다.
거리를 선점한 것은 제1야당 '공화인민당'(CHP)이다.
CHP의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지난달 15일 수도 앙카라부터 최대도시 이스탄불까지 450㎞를 24일간 도보로 행진하는 '정의 장정'(Adalet Yuruyusu)에 올랐다.
2년 전 터키 정보당국이 시리아 무장조직에 무기를 지원한다는 의혹을 폭로한 에니스 베르베로을루 의원에게 중형이 선고된 것이 계기가 됐다.
클르츠다로을루 대표 등 CHP 인사들과 지지자들은 '정의'(Adalet)라는 문구가 쓰인 팻말을 들고 베르베로을루 의원이 수감된 이스탄불 말테페 교도소를 향한 행진을 시작했다.
쿠데타 저지 후 국가비상사태 아래 사법 정의가 훼손됐으며 이를 되살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정당과 민족 배경을 떠나 반(反)에르도안(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 또는 비(非)에르도안 민심을 규합하기 위해 CHP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로고나 깃발을 배제했다.
큰 기대 없이 시작된 정의 행진이 반향을 일으키고 행진 인파가 수만명 규모로 불어나자 여당 '정의개발당'(AKP) 지도부가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에르도안 대통령까지 나서 여러 차례 정의 장정을 공개 비판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정의 행진을 '불법'으로 규정하면서, "야당이 정부의 은혜와 호의 덕에 그런 행진을 하는 것"이라고 조롱했다.
이달 1일에는 수위를 높여 "행진이 테러조직을 돕고 있으며,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사법질서에 대항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비날리 이을드름 터키 총리 등 다른 AKP 지도부도 연일 정의 행진 때리기에 열심이다.
터키 언론은 무기력한 야권이 처음으로 에르도안 대통령에 대항해 의제 설정에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여당은 쿠데타 저지 1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며 민심을 추스르는 모양새다.
터키 정부는 작년 쿠데타 시도 저지를 '터키 민주주의 승리'로 줄곧 강조했다.
AKP는 쿠데타 저지 1주년을 기념하는 '민주주의 감시' 행사를 11일부터 전국 81개 주와 해외에서 연다고 이달 4일 발표했다.
수도 앙카라와 최대도시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대규모 집회에는 에르도안 대통령과 이스마일 카흐라만 의회 의장이 참석한다.
외신 기자들도 대거 초청했다.
쿠데타 저지 1주년을 기념하는 조형물도 이스탄불과 앙카라 곳곳에 설치된다.
이브라힘 칼른 터키 대통령실 대변인은 야당의 정의 장정에 여론이 주목하는 것과 관련, "쿠데타를 막은 영웅 정신을 살리는 것이 국민의 주 관심사가 돼야 한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한편 5일 수니파 극단주의조직 '이슬람국가'(IS) 조직원 6명이 정의 행진을 노린 공격을 모의한 혐의로 붙잡혔다는 소식이 카이세리주지사 발언을 통해 전해졌다.
CHP는 용의자들이 특별히 정의 행진을 노린 것은 아니었다는 경찰 수사 내용을 강조하면서, 안전 우려로 정의 행진 열기가 식을까 촉각을 곤두세웠다.
뷜렌트 테즈잔 CHP 대변인은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참가자들이 늘고 있으며 이스탄불에 가까이 가면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tr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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