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장전 들어가도 회수율 미미" vs "성실한 채무자는 바보냐"
은행마다 시효연장·포기·소각 제각각…은행聯 '모범규준' 추진
(서울=연합뉴스) 홍정규 기자 = 채무자의 빚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은 대선 때마다, 또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정치권의 단골 메뉴였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7천억 원을 들여 금융채무 불이행자(신용불량자) 72만명의 연체이자를 탕감하고 신용회복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2013년 박근혜 정부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기업대출 연대보증의 덫에 걸린 신용불량자 11만명을 구제하겠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소액·장기연체 채무의 과감한 정리, 소멸시효가 완성되거나 임박한 '죽은 채권' 관리 강화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문 대통령의 공약은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서 한층 강화됐다. 애초 문 대통령은 국민행복기금의 소액·장기연체(1천만 원 이하, 10년 이상) 채권만 대상으로 삼았지만, 국정위는 일반 민간 채권까지 확대할 수 있는지 금융위원회에 타진했다.
이런 주문은 아무리 빚을 갚지 못했더라도 사망할 때까지 연체자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건 가혹하고, 재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에 토대를 뒀다.
은행은 이자 납입이 한 달 이상 늦으면 원리금을 모두 '연체'로 분류한다. 연체가 발생한 지 1년이 지나면 '손실'로 잡힌다. 원리금을 온전히 회수할 가능성이 작다는 의미다.
은행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충당금을 쌓는다. 그러면서도 빚 독촉을 멈추지는 않는다. 이 같은 채무의 소멸시효는 5년이다.
5년이 되면 은행은 법원에 소송을 낸다. 건당 20만 원의 비용이 든다. 소송은 요식행위다. 소멸시효는 10년 연장되고, 10년 뒤 또 소송을 내면 재연장된다.
금융감독원이 12일 국회 정무위원회 박용진 의원(더불어민주당)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이처럼 은행이 '빚독촉 연장전'에 돌입하는 채무자가 매년 3만∼4만 명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보통 20년이 넘으면 웬만한 은행도 포기한다"며 "그 전에 채무자가 사망하는 등 회수가 불가능해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은행이 원리금 회수를 포기하는 규모는 최근 매년 1만명 남짓이다. 이미 연체이자가 불어나 원금보다 많아진 경우다. 2014년부터 올해 1분기까지 시효가 완성된 '포기 채권'은 원금이 2천730억 원, 이자가 4천260억 원이다.
은행이 포기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다른 은행의 전산에서는 지워지지만, 해당 은행에는 연체 기록이 남아 소각될 때까지 정상적인 금융 거래를 할 수 없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출자가 자발적으로 빚을 갚을 수도 있으니 전산원장에서 삭제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시효 완성 채권의 소각을 약속했다. 은행들은 지난해까지 소각에 소극적이었다. 국민·우리·신한·KEB하나 등 4대 시중은행의 소각 실적은 '제로'였다.
그러더니 올해 들어 10만건 넘게 소각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과 조기대선, 문 대통령의 당선이 유력시된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굳이 이처럼 눈치를 보지 않더라도 은행들이 관행적으로 해 온 연체 채권의 시효 연장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온다.
2014년 이후 은행들이 시효를 연장한 채무자는 11만8천543명이다. 이 가운데 미상환 채무자가 7만4천813명이다. 시효 연장에도 채무자의 약 70%가 빚을 갚지 않았거나, 못했다는 의미다.
따라서 장기·소액 연체 채무의 경우 상환 가능성이나 채무 관리 비용을 따져 은행이 '합리적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게 민주당 의원들의 주장이다.
다만 은행이 연체 채권을 포기하는 데는 내부적인 책임론이 따를 수 있고, 국정위 주문대로 정부가 이를 사들일 경우 예산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특히 '버티면 다음 대선 때 탕감해준다'는 인식이 확산할 경우 신뢰를 기반으로 한 금융 시스템이 흔들리고, 성실하게 빚을 갚는 채무자와의 형평성도 깨진다는 우려 역시 적지 않다.
금융권은 일단 은행마다 제각각인 시효 연장, 포기, 소각 등 연체 채권의 관리 방안에 대한 자체 가이드라인(모범규준)을 마련 중이다.
가령 주요 시중은행이 채권 소각에 손을 놓은 사이, 기업은행[024110]은 2014년 870건, 2015년 1천520건, 2016년 1천539건 등으로 꾸준히 소각해왔다.
금감원 관계자는 "소액·장기 연체 채권은 채무자도 부담이고 은행도 부담"이라며 "못 받을 걸 알면서도 계속 연장하는 게 맞는지 면밀히 따져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zhe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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