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규 교수 "사주술, 中서 유교와 결합…조선시대에 적극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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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정조 24년(1800) 2월 26일 임금이 나라의 역술가인 국복(國卜)에게 간택한 처자들의 사주(四柱)를 물었다.
그러자 국복 이해담은 "대길 대귀(大貴)의 격"이라며 "수와 귀를 겸하고 복록도 끝이 없으며 백자천손을 둘 사주여서 다시 더 평할 것이 없다"고 답했다.
사주는 태어난 해와 달, 날, 시의 네 간지를 바탕으로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점이다. 간지는 '정유'(丁酉), '기미'(己未)처럼 두 글자이므로 사주는 모두 여덟 글자가 된다. 이른바 사주팔자(四柱八字)다.
사주는 바꿀 수 없으므로 일종의 운명처럼 여겨진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사주를 은근히 신경 쓰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동양의 전통적인 점술인 사주에는 부침이 없었을까. 사주를 신봉하는 사람은 언제나 많았을까.
김두규 우석대 교수는 사주의 형성 과정과 발달사를 추적한 논문 '사주 이론들의 사회사적 배경 연구 시론'에서 이런 물음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주도 시대적 상황에 따라 영향력이 달라졌고, 결론적으로는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논리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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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는 우리나라에 사주가 유입된 과정만 봐도 사주의 성격과 한계를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제자백가 중 음양가(陰陽家)에 해당하는 사주는 고려시대인 13세기 이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고려사'에는 사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 시기에 가장 유명한 점술가는 오윤부였는데, 그는 별점으로 운명을 예언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사주가 점술로 폭넓게 활용된다. 김 교수는 "경국대전을 보면 사주 서적이 운명과 길흉을 연구하는 학문인 명과학(命課學)의 정식 고시과목으로 채택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조선이 사주를 받아들인 이유에 대해 "불교 대신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한 것처럼, 사주라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 것"이라며 "사주 이론은 유교, 농경사회에 부합했다"고 분석했다.
중국에서 하늘과 사람이 합일체라는 유교의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과 사주 이론은 오래전부터 결합했다. 한나라 시기의 대유학자인 동중서는 음양오행을 우주 만물의 원리로 수용했다. 이러한 전통은 송나라 때 새로운 유교철학을 정립한 주자까지 이어졌다.
김 교수는 "중국에서 패권 국가를 만들 수 있는 사상은 유가나 묵가가 아니라 병가, 법가, 음양가였다"며 "사주와 같은 음양가는 백성을 복종시키는 주요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했다. 당이 멸망하고 송이 중국을 다시 통일하기 전까지의 5대10국(907∼960) 시대에는 군벌이 음양가와 결탁하기도 했다.
사주가 농경사회에서 득세한 이유는 농사에서 '때'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다 보면 씨앗을 뿌리고 곡식을 수확하는 시점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연월일시로 구성된 사주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반면 유목민족에게는 이동할 때 길잡이가 되는 밤하늘의 별이 더욱 의미가 있었다.
김 교수는 "유가와 농경사회가 근간인 송나라 때 발전한 사주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때는 쇠퇴했고, 명대에 다시 흥했다"며 "원나라는 불교의 일파인 라마교와 도교의 일파인 전진교를 신봉했기에 사주를 수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내 상황에 대해 "사실상 원나라에 복속된 고려에서는 사주가 정착하기 어려웠다"며 "이번 생은 전생의 업보라는 불교의 믿음도 사주술과는 어울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논문은 동양사회사상학회가 내는 학술지인 '사회사상과 문화' 제20권 2호에 실렸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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