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14가구(65명) 정착…"하와이보다 40년 앞선 해외 개척사"
러시아혁명 거치며 독립군 분열…고려인, 벼 재배 북방한계선 높이다
[※ 편집자 주 = 옛 소련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 17만∼20만 명이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지 올해로 80주년을 맞습니다. 고려인강제이주80주년기념사업회는 오는 23일부터 선조들이 당한 수난의 흔적을 더듬어보고 한민족공동체 발전 방안을 모색하는 회상열차 대장정에 오릅니다. 연합뉴스는 8월 4일까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이르는 6천500㎞의 여정을 함께하면서 회상열차 탐방단의 활동과 한민족의 러시아 디아스포라 역사, 강제이주의 발자취와 역사적 의미, 독립운동 유적 현황,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현주소 등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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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러시아 공식 문서에는 한민족이 연해주에 살았다는 기록이 1864년에 등장한다. 그해 9월 21일 남우수리스크 포시에트지구 노브고로드 경비대장인 레자노프는 상급 지휘관인 해군 소장 카자케비치에게 "함경도 무산 출신 최운보와 경흥 출신 양응범이 이끄는 14가구 65명이 올 1월 이주해 포시에트의 지신허(地新墟·치진헤) 마을을 개척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고 보고했다.
실제 이주는 그전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 지역 고려인들도 여기에 근거해 이주 기념행사를 열어왔다. 착취와 기근 등을 피해 두만강을 넘는 조선인은 해가 갈수록 불어나 1867년 1월에는 185가구 999명에 이르렀다.
1869년에는 조선 북부 지방에 홍수로 인한 '기사흉년'이 발생해 함경도 농민 6천500여 명이 대거 이주했다. 1897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한인 숫자는 2만6천 명을 넘어섰고 이 가운데 일부는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도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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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취·기근 피해 '신천지'로 건너간 조선인들
러시아인들은 자국으로 이주한 조선인을 '코리안'이라는 뜻의 '카레이츠' 혹은 '카레이스키'라고 불렀다. 당시 국호는 조선이었지만 서양에서는 코리아라고 불렀으니 한인들도 러시아인이 부르던 말을 직역해 조선인 대신 고려인을 자처했다.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의 저자인 원로 언론인 김호준 씨는 "한인이 연해주로 집단 이주한 것은 미국 하와이 농업이민보다 40년 앞선 우리 민족 최초의 해외 개척사"라고 평가했다.
'고려인 러시아 이주 150년 한반도 한민족 통사-까레이스키'를 펴낸 이창주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 석좌교수는 "연해주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신천지여서 소작이 아닌 자기 경작을 할 수 있었고, 일본인이나 중국인보다는 러시아인에게 적대감이 적어 연해주를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고려인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태도는 들쭉날쭉했다. 고려인의 뛰어난 근면성과 농사 기술을 높이 사 농경지 개발에 이용하려는 총독이 있는가 하면, 고려인들이 토지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집단의식이 높다는 점에 우려를 표명하며 반고려인 정책을 취한 총독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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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빼앗긴 국권 되찾자" 영웅들의 활동무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10년 강제합병이 이뤄지던 시기를 전후해서는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자 우국지사들이 대거 건너가 연해주는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이 됐다.
간도관리사를 지내다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과 싸우던 이범윤은 러일전쟁 직후 연해주로 옮겨 국내 진공작전을 폈고, 안중근도 그와 함께 전투를 펼치다가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을 세워 거사에 성공했다.
만주에 서전서숙을 세워 항일지사를 길러내던 이상설은 헤이그 특사의 임무를 마친 뒤 연해주에서 권업회와 동지회를 결성하고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는 등 애국혼을 불살랐다. 그와 함께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위종도 한때 이곳에서 숙부 이범윤과 함께 활동했다.
이동휘와 이동녕은 북간도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국권 회복을 꾀하다가 일제의 위협이 노골화하자 연해주로 옮겨 이상설 등과 독립투쟁을 이끌었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는 연해주와 만주를 넘나들며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러시아 이민 초기 연해주에 정착해 사업을 벌인 최재형은 모은 돈과 구축한 네트워크로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 신한촌·자유시 참변 거치며 독립군 세력 약화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연해주 한인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동휘를 비롯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김알렉산드라·오하묵 등 한인 2세 볼셰비키 당원들은 1918년 5월 13일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결성했다.
사회주의 계열의 한인 의병들은 러시아혁명군(적군)에 가담해 그해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한 일본군과 싸웠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군 세력이 속속 연해주에 집결하자 1920년 4월 일본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급습해 한인 300여 명을 학살하고 방화와 파괴를 저질렀다. 이른바 '4월 참변(신한촌 참변)'으로 이때 최재형이 붙잡혀 총살됐다.
1921년 6월에는 국제공산주의 조직 코민테른의 지원을 업은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과 한인의 지지가 두터운 민족주의 계열의 한인사회당(상하이파)이 주도권 다툼을 벌이던 중 적군과 이르쿠츠크파가 상하이파를 공격해 300명 넘게 숨졌다. 이 사건이 '자유(스보보드니)시 참변(흑하사변)'이다. 이로 인해 독립군 세력이 크게 약화됐다. 더욱이 1922년 일본군이 물러나자 적군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독립군을 무장해제했다.
◇ 고려인 20만명까지 불어나…신문·학교·극단도 등장
독립 열기는 퇴조했지만 연해주로 이주하는 한인은 더욱 불어났다. 1930년대 무렵에는 20만 명 넘게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고려인의 집단 거주지에는 한글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고 공연단체도 등장했다. 아마추어 공연단체들을 토대로 1932년 창단된 것이 지금도 카자흐스탄에서 명맥을 잇고 있는 고려극장이다.
한국어로 교육하는 학교도 곳곳에 설립돼 고려인 교사들을 가르치는 사범대까지 생겨났다. 1922년에는 45개이던 한인 학교가 1927년에는 267개로 늘어났다.
벼 재배의 북방한계선을 높여놓은 것은 전적으로 고려인들의 공이다. 기록상으로는 1905년 연해주에서 본격적인 벼농사가 시작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러시아인들은 수리시설도 없는 황무지에서 벼농사를 지으려는 것을 무모하게 여겼지만 고려인들은 보란 듯이 성공했고 끈질긴 노력으로 박토를 옥토로 바꿔나갔다.
1928년에는 벼농사조합도 탄생했다. 당시 벼 재배 농부 11만378명 가운데 러시아인이 1천196명, 중국인이 6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고려인이었다. 1925년 세워진 10개년 계획을 보면 벼 재배 면적을 1926년 1만3천㏊에서 1936년 9만4천㏊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이는 고려인들의 이주와 개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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