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술에 취해 부모나 친구 등을 죽이거나 여성을 성폭행하는 강력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범행을 저지르는 사람의 직업이나 연령은 다양하다.
평소 얌전하던 종교인이나 고위 공무원, 대학생, 연예인 등이 술통에 빠져 야수로 돌변한 사례가 적잖다.
이들은 음주 이후 충동조절 능력을 상실한 듯 매우 사소한 자극에도 살기를 발산하거나 몹쓸 짓을 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음주를 즐긴 데다 취중 잘못에 관대했으나 지금은 사회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법원은 음주로 심신이 미약해진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에 형량을 줄여주던 관행을 깨고 근래에는 종종 무관용 판결을 내린다. 관공서는 물론, 일반 기업도 음주 일탈을 매우 엄하게 다스린다.
술김에 자칫 방심했다가는 명예만 잃는 게 아니라 패가망신하는 세상이 됐다.
에티오피아에 파견된 한 외교관이 함께 식사하던 여직원과 술을 나눠 마신 뒤 만취 상태에서 성폭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최근 파면됐다.
국가공무원법상 최고 중징계인 파면을 당하면 5년간 공직 재임용이 제한되고 퇴직 급여와 수당이 절반으로 깎인다.
육군 대장이 2014년 전군 특별군사대비태세 기간에 만취돼 옷 단추가 풀리는 등 흐트러진 모습으로 고속도로 휴게소에 나타났다가 전역하기도 했다.
학교 회식에서 술을 마신 여학생을 성폭행한 대학원생이 3년 징역형을 내린 1심에 불복해 항소했으나 최근 고등법원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며 기각 처분을 내렸다.
인류 역사를 보면 술 때문에 본인과 가족은 물론, 국가까지 망한 사례가 숱하게 많다.
중국 은나라 주왕은 애첩 달기를 기쁘게 해주려고 연못에 술을 채우고 나무에는 고기를 매달아 놓고 수시로 잔치를 벌였다. 주지육림의 유래다.
국정을 내팽개친 채 술독에 빠졌다가 헤어나지 못해 결국 은나라는 망한다.
뒤이은 주나라는 술이 나라를 망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금주령을 내린다.
여러 명이 어울려 술을 마시는 군음은 극형으로 다스렸다. 오늘날 회식과 같은 자리에 나갔다가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게 한 것이다.
지중해 시칠리아 섬 남동쪽 해안 도시인 시라쿠사가 막강한 로마군 침공에 맞서 2년간 잘 버티다가 기원전 212년 한순간에 몰락한 것도 술 때문이었다.
로마군은 사다리 등을 동원해 성벽을 넘으려고 했으나 유명한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아르키메데스가 발명한 투석기 공격 등에 막혀 번번이 실패했다.
하지만 연승에 도취해 경계심이 느슨해진 시라쿠사 병사들은 어느 날 아르테미스 여신을 기리는 축제를 성대하게 열어 술에 만취됐다가 그 틈에 외벽을 넘어 성안으로 잠입한 로마군에 몰살당한다.
당시 아르키메데스는 기하학 문제를 푸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가 갑자기 괴한들이 들이닥치자 나가라고 고함을 질렀다가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로마군이 휘두른 칼에 살해당했다고 한다.
신라 경애왕은 927년 포석정에서 술잔치를 벌이느라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 군대가 경주를 침략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다가 최후를 맞는다.
거북 모양의 큰 돌에서 물이 나와 천천히 흘러가도록 설계된 포석정에서 경애왕 일행은 유상곡수 연회를 벌이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유상곡수는 물길을 따라 떠다니는 술잔이 자기 앞에 도착하기 전에 시를 한 수 읊되 실패하면 벌주를 마시게 하는 놀이다.
이 때문에 경주 남산 자락 포석정은 왕과 귀족의 놀이터로 신라 멸망의 현장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하지만 견훤이 쳐들어온 것은 한겨울이어서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인 게 아니라 호국 제사를 지내다가 죽었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조선 한성부 판윤(서울시장)과 이조판서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하던 이세좌(1445~1504년)도 술자리 실수 탓에 나락으로 떨어진 인물이다.
이세좌는 궁궐 양로연(경로잔치)에서 연산군이 신하들에게 돌아가며 권하는 술잔을 취중에 잘못 받아 임금 옷에 술을 엎지르고 말았다.
연산군은 자신을 능멸했다고 생각하고서 이세좌를 함경도로 귀양보냈다가 1년 뒤에는 자결을 명령해 죽도록 한다.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 위에 오른 세조 집권기에도 음주 참사가 있었다.
세종대왕의 고명대신(유언 받드는 신하)이자 두만강 일대를 호령하며 영토를 확장한 김종서를 제거함으로써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도운 양정이 희생자다.
1466년 평안도 병마절도사(지역 군사령관)로 근무하다가 한양에 들른 양정의 노고를 위로하는 궁궐 잔치에서 사달이 났다.
세조와 양정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돌발 사태가 발생한다.
세조가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했고, 즉위한 지 오래됐으니 이제 왕 위에서 물러나 편하게 여생을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양정이 건의한 것이다.
피바람을 일으켜가며 왕권을 잡은 지 12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신하가 면전에서 퇴위를 압박하자 세조는 분노와 충격에 빠진 듯 한동안 말을 잊는다.
이어 침묵을 깬 세조는 "양정의 말이 맞다. 내가 덕이 없으니 세자에게 보위를 물려주겠다"며 옥쇄를 세자에게 넘기도록 지시한다.
이 순간에 한명회와 신숙주 등 대신들이 일제히 통곡하면서 애걸한 끝에 퇴위를 간신히 막는다.
정통성 문제로 자격지심에 시달리던 세조의 역린을 건드린 대가는 혹독했다.
양정은 나흘 뒤 망나니 칼에 목이 날아가고 자식들은 관노로 전락했다.
왕의 총애를 믿고 편안한 마음으로 연거푸 술잔을 받았다가 한껏 달아오른 취기에 내뱉은 한 마디 때문에 멸문지화를 당한 것이다.
신숙주도 취중 실수를 했으나 친구이자 세조의 최측근 한명회의 도움으로 무사했다.
신숙주는 세조와 술을 대작하다가 팔씨름 제안을 받고 온 힘을 다해 왕의 팔을 단박에 꺾어버렸다.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문신일지라도 체력 또한 왕성하다는 사실을 임금한테 보여주고 싶은 생각에서 팔에 불끈 힘을 줬는지 모르지만, 세조로서는 몹시 불쾌했다.
신음할 정도로 심한 통증을 느낀 세조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술자리를 일찍 끝내버린다.
현장에서 왕의 불편한 심기를 읽은 한명회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머슴을 신숙주에게 보내 곧바로 불을 끄고 다음 날 아침 늦게까지 자도록 주문한다.
세조는 괘씸한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내시를 시켜 신숙주 동태를 살피도록 한 뒤에야 비로소 노기를 푼다.
습관적으로 취중에도 늦도록 책을 읽던 신숙주가 그날은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술은 폐해만 있는 게 아니다.
적당히 마시면 심장병과 치매를 예방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좋은 벗들과 나눌 때는 삶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외교·정치 협상장이나 사교 모임 등에서 술잔이 돌아가면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금방 화기애애하게 바꾸는 마력도 있다.
중국 송 태조 조광윤(927~976년)은 만취 상태에서 얼떨결에 황제가 됐고 중앙 권력을 술로써 안정시킨 인물로 유명하다.
조광윤은 960년 과음으로 쓰러져 잠든 사이에 휘하 장수들이 황제 옷을 입힌 사실을 뒤늦게 알고 못 이기는 척하며 수락함으로써 송나라 태조가 된다.
집권 3년 후에는 건국에 기여한 장군들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잔치를 베풀어 술잔을 돌리다가 기습 제안을 한다.
"병권을 놓고 지방으로 가서 늙을 때까지 풍요롭게 지낸다면 군신이 서로 의심하지 않고 편하지 않겠는가"라며 낙향을 권고한 것이다.
왕권을 넘볼 여지를 미리 제거하려는 조광윤의 속내를 간파한 공신들은 서둘러 군복을 벗고 지방으로 내려간다.
술로써 병권을 놓게 했다는 고사성어 배주석병권이 생긴 유래다.
하반신 마비 장애를 딛고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선 대통령을 지낸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년)는 술을 백약지장으로 삼았다. 술은 100가지 약 중에서 으뜸이라는 것이다.
1933년 대통령에 취임한 루스벨트는 뉴딜정책으로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승리를 이끈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16년간 강력하게 유지돼온 금주법을 취임 직후 없애버리고 본인부터 술을 즐긴 루스벨트는 마티니를 거의 매일 마실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각료회의가 오후에 열릴 때는 손수 만든 칵테일을 장관들에게 돌렸다고 한다.
1972년 냉전체제의 한 축을 무너뜨리는 역사적 현장에도 술이 등장했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아시아·태평양 평화 구상 등을 담은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한 식당에서는 중국 전통주 마오타이가 돌아갔다.
저우언라이가 건배를 제의하자 닉슨은 건배 땐 입에 갖다 대는 시늉만 하라는 보좌관의 귀띔을 무시한 채 단숨에 들이켰다.
알코올 도수 40도를 넘는 술이 든 잔을 비우느라 잠시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그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간 덕분에 중국 건국 이후 27년간 서방에 적대적인 죽의 장막이 걷혔다.
마오타이 술잔은 닉슨의 목구멍을 넘어갈 때 다소 썼지만, 미·중 수교를 견인한 연료 역할을 한 셈이다.
임진왜란 영웅 이순신도 막걸리를 즐겨 마셨으나 폭음은 경계했다.
정신이 흐려지면 주사를 부릴 수 있는 데다 밤에 불을 끄지 못해 적에게 위치를 드러낼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술을 귀한 음식으로 여겨 절제의 미를 유지하면 장수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조선 최장수 임금인 영조(1694∼1776년)가 모범 사례다.
약골 체질인 영조는 봄마다 생기는 싱싱한 소나무 가지 마디(송절)와 쌀로 빚은 송절주를 조금씩 꾸준하게 마셨다.
술은 아무리 장점이 많더라도 자칫 방심해 임계치를 넘어서면 불행과 비극의 씨앗이 된다.
이때는 "석 잔 술에 도가 통하고 한 말이면 자연과 합치한다"는 당나라 시인 이태백(701~762년)의 노래는 악마의 속삭임이 된다.
지금은 취중 실수나 범죄를 너그럽게 대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래 프랑스 속담은 탄광 속 카나리아로 삼을 만 하다.
"악마가 사람을 찾아다니기에 바쁠 때는 술을 대리인으로 보낸다"
"전쟁과 흉년, 전염병 폐해를 모두 합쳐도 술의 해악과 비교할 수 없다"는 영국 정치인 윌리엄 글래드스턴(1809~1898년)의 경고도 귀담아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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