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슈이치 장편소설 '다리를 건너다'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올해로 데뷔 20년이 된 요시다 슈이치(吉田修一·49)는 인간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작가다. 살인사건 이야기라도 범인을 쫓는 대신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심리를 정밀하게 묘사한다. 시선은 세상사를 훑는 듯하지만 결국 그 아래 숨겨진 사람의 마음속을 향한다. 이런 태도를 세련된 문장에 담아 평단과 독자 양쪽의 지지를 받아왔다.
신작 장편소설 '다리를 건너다'(은행나무)의 인물들에게서 눈에 띄는 건 감정의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의지다. 사람은 누구나 불안과 스트레스를 최소화해 일상을 안정적으로 영위하고자 한다. 생존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지나치면 아집과 자기합리화의 덫에 빠질 수도 있다.
소설은 세 인물, 아키라·아쓰코·겐이치로의 일상을 계절의 흐름에 따라 차례로 그린다. 작가는 안온한 삶에 이는 작은 파도에 남들은 어떻게 대처하는지 독자로 하여금 관찰하도록 한다. 세 사람은 대체로 평범하고 선량하며, 서로 모르는 사이다.
맥주회사 영업과장 아키라는 미술관 큐레이터인 아내 아유미, 고등학생인 처조카 고타로와 산다. 화목하고 평화롭지만, 아키라는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준다. 신혼인데다 아내가 싸주는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는 '꽃미남' 회사 동료 나카무라가 풍속업소에 다니는 걸 우연히 알게 됐을 땐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 녀석도 겉보기와는 다르게 엄연히 원하는 게 있고, 아직 손에 넣지 못했다고 생각하자 왠지 기분이 개운해졌다."
아내는 작품을 들고 미술관에 자꾸 찾아오는 남자가 못마땅하다. 나중엔 집에 찾아오기까지 하니 무서울 정도다. 재능이 없어 보여 내친 그가 어느새 업계의 인정을 받기 시작하자 불안해진다.
도의회 의원 히로키의 부인 아쓰코는 불안한 여름을 보낸다. 의회 성희롱 발언 사건이 일파만파 커져서다. 독신인 여자 의원에게 "아이를 못 낳나"라고 야유한 동료 의원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혹시 남편이 한 짓 아닐까. 사람들이 자기에게 해코지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남편이 업자에게 뇌물을 받는 장면까지 목격하면서 불안은 극에 달한다.
다큐멘터리 감독 겐이치로의 가을 역시 심란하다. 홍콩 우산혁명을 취재하며 자부심에 젖어있다가도 연말에 결혼할 여자친구 때문에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사실을 확인한 겐이치로는 중얼거린다. "난 잘못되지 않았어." 그러고 나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
서로 무관한 세 명의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은 70년 후, 2085년 겨울에 만난다. 두 세대쯤 후손들을 통해서다. 로봇이 대부분의 노동을 해주고 차별과 배제가 몸에 밴 듯 자연스러운 사회다. 혈액세포 조합으로 탄생한 인격체 '사인'이 차별의 대상이다. 사인은 로봇과 인간의 중간쯤에 있는 존재다. 수명은 인간보다 짧고, 도망치면 인간의 사냥감이 된다.
건조하게 그려지는 미래세계는 동시대 인물들의 삶과 연결돼 있다. 아키라와 아쓰코·겐이치로가 당장의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택한 행동의 결과들이 마지막에 가서 제시된다.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미래 역시 그들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때 바꿨으면 좋았을 거라고 누구나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바꾸려 하지는 않는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미래로 이동한 겐이치로는 후회한다. 시공간을 오가는 판타지는 역설적으로 현재의 선택을 되돌릴 수 없음을 강조한다.
작가가 처음 활용한 판타지 요소와 함께 일본 의회에서 벌어진 성희롱 야유, '탈레반 피격소녀' 말랄라 유사프자이의 노벨평화상 수상 등 실제 일본 안팎의 사건들이 이야기 전개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한다. 위안부 '강제 연행' 관련 증언과 세월호 참사도 등장한다. 이영미 옮김. 548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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