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요리학교 거쳐 한화FC 외식사업부 근무…"정체성 찾는 여정"
요리 심리치료사 꿈 키워…"돌아올 기약 없는 유배길 안타까워"
(노보시비르스크<러시아>=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80년 전 고려인 강제이주 수난의 길을 따라가는 '극동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회상열차'에는 다양한 사연을 지닌 각계각층의 인사 84명이 탑승했다.
그 가운데서도 한화푸드컬처(FC) 외식사업부 이다미(27) 씨의 이력과 참여 동기는 유독 눈에 띈다. 한국에서 태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17년간 살다가 미국을 거쳐 다시 모국으로 돌아온 데다 이번 행사의 후원사인 한화그룹 사원 참가자 공모에서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뽑혔기 때문이다.
31일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카자흐스탄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인터뷰에 응한 이 씨는 이른바 중앙아시아 국가 뉴커머 동포 1.5세로서 정체성 고민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참가했다고 털어놓았다.
"처음엔 공모 포스터에 그려진 지도를 보고 우즈베키스탄까지 가는 줄 알고 '잘하면 공짜로 엄마 아빠가 계시는 집에 갈 수 있겠네'라는 마음이 앞섰죠. 신청 사연을 쓰다 보니 저희 집 일을 도와주신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와 운전기사 아저씨가 떠올랐고, 고려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1937년 강제로 끌려와 겼었을 고생과 설움을 생각하니 이방인 아닌 이방인으로 사는 제 처지도 돌아보게 됐어요. 이번 기회에 제대로 모르고 있던 고려인 수난사도 더듬어보고 제 정체성 고민도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광주광역시에서 수입소고기 판매점을 운영하던 이 씨의 아버지는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이 국교를 맺자 1994년 가족을 데리고 누나 가족과 함께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 한국의 가전제품을 수입해 파는 무역업체를 타슈켄트에 차렸다.
이 씨는 그곳에서 우즈베크 어린이들과 함께 일반 초등학교에 다녔다. 대부분 과목을 소련 시절 만든 교과서로 배우고 친구들과도 러시아어로 대화했다. 우즈베크어 과목이 하나 있긴 했는데 굳이 우즈베크어를 배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야 러시아어 대신 우즈베크어로 쓰인 교과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친구들과 러시아어로 대화하니 생각도 러시아식으로 했다고 한다. 집에 와서는 한국말을 쓰고 한국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니 헷갈릴 때가 많았다. 영어로 공부하는 국제중학교로 진학하니 똑같은 생김새의 한국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반갑기는 했지만 그들은 대부분 공공기관이나 기업체 지사 주재원 자녀들이어서 계속 얼굴이 바뀌었다. 이별의 상처를 자주 겪다 보니 아예 정을 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 친구 사귀는 일을 끊기도 했다고 한다.
이 씨는 우즈베크나 한국 친구들과는 처지가 다르다는 사실에 정체성 혼란에 빠졌고 진로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그런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을 안겨준 것은 요리였다.
"어렸을 때부터 음식 만드는 일이 즐거웠어요. 아빠가 요리를 좋아하셔서 주말마다 타슈켄트의 고려인 시장에서 배추와 무와 고추 등 한국식 식재료를 사와 온 가족이 함께 한국 음식을 해먹었죠.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빵이나 케이크도 만들 줄 아는 등 요리 솜씨가 뛰어나 많이 배웠어요. 고2, 고3 무렵 한창 스트레스가 심하고 남들과 어울리는 것도 피하고 싶은데도 제가 요리한 음식을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요리로 저 자신을 표현하고 음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겠다고 결심했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요리학교를 알아보던 중 미국 뉴욕의 CIA(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의 모집 공고 문구가 눈에 확 들어왔다고 한다. 'We Speak Food'(우리는 음식을 말한다), 음식으로 사람들과 대화하겠다는 그에게 딱 맞는 표현이었다. 앞뒤 돌아보지 않고 원서를 내 합격 통지를 받고 뉴욕으로 날아갔다.
CIA는 기본 2년제로 운영되는데 2년의 경영 과정을 추가로 밟을 수 있다고 한다. 대학으로 치면 4학년 때 미슐랭가이드 별 두 개짜리 식당 '일레븐 매디슨 파크'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6개월 동안 채소 다듬고 접시 닦고 주방 바닥 청소하며 성실성과 가능성을 인정받아 그곳 오너셰프가 따로 운영하는 인근 '더 노마드'의 정식 직원이 됐다. 그런데도 1년 만에 사표를 내고 이번엔 한국을 택했다.
"제가 원한 길을 가고 있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얻었는데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한국 친구가 그리워 만나면 다른 친구들 흉을 많이 보는 거예요. 제가 없는 자리에서는 제 험담을 많이 하겠다 싶어 한국 사람 만나는 걸 꺼리게 됐죠. 제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아무 대책도 없이 한국행 비행기를 탔죠. 부모님은 타슈켄트에 계셨지만 동생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조금 후 셋째도 한국으로 와 세 자매가 함께 살고 있죠."
마음의 안정은 찾았지만 정체성 고민이 금세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한국어가 익숙지 않아 주의의 놀림도 받고 심지어 중앙아시아 핏줄이 섞인 것 아니냐는 오해도 받았다.
직장도 빨리 구하지 못했다. 실력과 경력은 남 못지않았지만 인정받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 국내 패스트푸드점 경력은 쳐주면서도 자영업 식당의 경력을 외면하는 한국의 요리업계 풍토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화FC 외식사업부가 음식 레시피(조리법) 전산화를 위해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해 자료 정리를 맡았다가 눈에 띄어 정식 직원으로 채용됐다.
지금은 한화의 외식브랜드 티원(T園) 표준 레시피 개발과 외식 전산시스템 기획 업무를 맡고 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요리로 심리 치유를 하는 직업을 개척하겠다는 꿈을 키워가고 있다.
고려인이 강제이주의 수난을 당했다는 사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랄해로 함께 여행을 떠난 친척 언니에게서 처음 들었다. 집에서 일하는 고려인 아주머니나 아저씨도 말해주지 않았다.
"제 생각엔 그처럼 모진 고통을 당할 때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 조국을 잊고 싶기도 할 텐데 타슈켄트 고려인문화센터에서 한국의 전통 춤과 노래를 배우고 즐기는 모습을 보면 민족이라는 게 참 대단하다고 느껴져요.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에서도 공연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수리스크 최재형 선생 고택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기념탑도 인상적이었고요."
24일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부터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카자흐스탄 철도로 갈아타 장장 6천500㎞를 달리는 일이 지겹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나이답지 않게 의젓한 대답이 돌아왔다.
"열차 안이 비좁고 씻는 것도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저희는 편하게 가잖아요. 잠자리나 먹을 것도 걱정 없고, 더위나 추위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요. 무엇보다 어디로 가는 줄 알고 있고 돌아갈 곳도 있는 말 그대로 여행이잖아요. 그분들은 열차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목적지도 모른 채 돌아올 기약도 없는 길을 떠나셨다고 하잖아요. 이번 여행에서 비록 부모님은 못 뵙고 오지만 고맙고 뿌듯합니다."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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