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권훈 기자=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전문 캐디로 일하는 A는 지난 시즌에 황당한 경험을 했다.
1라운드 때 선수가 계속 짧은 퍼트를 놓치고선 풀이 죽어 있었다. 그는 조용히 선수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그럴 때도 있다. 오늘은 아닌가 보다 생각하고 맘 편하게 먹자."
선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 홀부터 퍼트가 살아났다. 선수는 경기가 끝난 뒤에 "오빠 말 듣고 마음을 비웠더니 신기하게도 퍼트가 쏙쏙 들어갔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기가 막힌 일은 다음 날 일어났다. 경기 초반에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는 다시 한 번 "욕심내지 말자. 오늘은 아닌가 보다 하고 맘 편하게 먹자"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선수는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오빠는 지금 이 판국에 맘을 편하게 먹을 수 있겠어?"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말을 했는데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A는 결국 그 선수와 헤어졌다.
최근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가 9년 동안 호흡을 맞춘 캐디 J.P. 피츠제럴드를 해고하면서 '극한 직업' 캐디의 세계가 화제로 떠올랐다.
이에 앞서 리디아 고(뉴질랜드)에게 해고된 캐디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 입길에 올랐다. 필 미컬슨(미국)도 25년 동안 동고동락한 짐 매케이를 떠나보냈다.
사실 캐디 해고는 아주 자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선수가 캐디를 바꾸는 건 클럽 교체보다 더 잦다. 그만큼 캐디는 늘 해고의 위험 속에 산다.
해고 절차는 간단하다. 내일부터, 또는 다음 대회, 다음 시즌엔 안 나와도 된다는 말 한마디면 끝이다. 통보 시점도 선수 마음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해고 문자를 받았다는 캐디도 있다. 미셸 위의 캐디는 브리티시여자오픈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해고됐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나마 시즌을 마치거나 대회를 끝내고 해고되면 양반이다.
미국프로골프(PGA)투어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는 종종 경기 도중 캐디를 해고하는 일도 있다.
제시카 코다(미국)는 2013년 US여자오픈 3라운드를 치르던 도중 캐디를 해고했다. 10번홀 티샷을 앞두고 백은 코다를 응원하던 남자친구가 대신 멨다.
캐디를 해고하면서 내놓는 이유는 다양하다. 골프가 안 되는 이유만큼 많다.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는 게 가장 흔하게 듣는 이유다. 한마디로 분위기 전환용이라는 얘기다.
선수가 캐디를 바꾸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단 하나뿐이다.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선수가 바라는 캐디는 딱 하나다. 마음에 쏙 드는 캐디다.
그런데 그 마음이 시도 때도 없이 바뀐다는 게 문제다.
선수 마음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다. 어제는 찰떡같이 마음이 잘 맞던 캐디가 오늘은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같은 상황에서, 같은 말을 했다가 봉변을 당한 캐디 A는 황당했겠지만, 선수의 마음은 그만큼 오락가락한다.
선수들은 끊임없이 '좋은 캐디'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좋은 캐디'의 실체는 알고 보면 선수가 마음에 드는 캐디라는 뜻이다.
아무리 유능한 캐디라도 선수의 마음을 사지 못하면 함께 일하기 어렵다. 좀 무능해도 선수와 마음이 잘 맞으면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다.
10번이나 캐디를 해고한 리디아 고(뉴질랜드)는 "옆에서 '괜찮아, 다음 홀에서 버디를 할 수 있어'라거나 '다음 라운드에서 잘 치면 돼'라고 말해주는 사람, 좀 더 적극적이고 자신감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바라는 캐디 유형을 밝힌 바 있다.
그렇지만 리디아 고를 보좌했다가 해고된 캐디 가운데 상당수는 이런 역할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던 인물이다. 리디아 고의 마음이 바뀐 것이니 그들 잘못은 아닌 셈이다.
LPGA투어 특급 캐디로 명성이 높은 콜린 칸도 박성현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해고됐다.
특히 "톱10에만 들어도 잘한 거"라는 칸의 립서비스는 박성현의 불만 가운데 하나였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승부 근성이 남다른 박성현에게 칸의 말은 눈높이를 낮추라는 주문처럼 들렸다.
처음 LPGA투어에 발을 디딘 신인 선수가 주눅이 들까 봐 격려해주려던 칸의 배려는 외려 박성현의 마음을 사는 데 실패한 원인이 됐다.
KLPGA 투어에 유난히 아버지 캐디가 많은 이유도 선수와 마음이 잘 맞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딸과 아버지만큼 마음이 잘 맞는 관계는 없다지 않는가.
애초에는 경제적 이유로 아버지가 캐디로 나섰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져도 아버지 캐디를 고수하는 선수들이 수두룩하다.
13년째 아버지 김정원(61) 씨에게 캐디를 맡기는 김보경은 "다툴 때도 있지만 그래도 속은 편하다"고 말했다.
오지현, 장은수 등 아버지 캐디를 고집하는 선수들은 한결같이 전문 캐디보다 아버지 캐디가 훨씬 낫다는 생각이다.
이들 아버지 캐디들은 심지어 골프를 쳐본 적도 없다. 전문 지식이 캐디의 무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김예진은 캐디를 맡은 아버지의 룰 위반으로 2벌타를 받고도 우승하는 촌극을 벌였다. 그래도 그는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선수와 캐디는 본질에서는 고용인과 피고용인 관계이다.
그러나 코스에 나서면 캐디는 선수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존재가 된다. 선수가 든든한 지원군이라고 느끼는 캐디와 그렇지 않은 캐디는 천지 차이다.
선수가 캐디를 바꾸는 이유는 아마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또 어떤 선수가 오래도록 캐디와 함께한다면 그는 그를 진정한 '지원군'으로 받아들여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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