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서 17일 개막…'물성의 재발견' 새 기법 선보여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재작년 여름 서울 성북구 성북동 자택에 머무르던 유근택 작가(52)의 눈에 문득 모기장이 들어왔다.
성긴 천이 모기장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천장과 연결된 끈 덕분이었다.
끊을 끊게 되면 '툭' 하고 떨어지면서 그 형태를 잃어버리는 모습에 작가는 "마치 영혼이 툭 떨어지는" 모습을 본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모기장을 사이에 두고 안팎의 세계가 구분되는 듯한 느낌도 작가의 마음속에 남았다.
작가는 존재론에 질문을 던진 그 가벼운 천의 느낌을 살릴 기법을 고민했다.
마침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고 1991년 첫 전시를 연 이후 쉼 없이 달려왔던 작가 자신도 변화를 갈망하던 시점이었다.
그해 3월부터 3개월간 "다른 도구 하나 없이 한지만 하나 챙겨서" 베를린 인근의 한 레지던시에 머물렀던 경험도 변화 욕구를 자극했다.
"그린다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졌고 본질적인 새로운 질서를 필요로 했어요. 이를테면 동양화가 더는 운필(運筆)만 갖고서 현대의 감수성을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17일부터 열리는 개인전 '어떤 산책'은 그 고민에서 출발한 작업들을 선보이는 자리다.
모기장을 소재로 한 1층의 '방' 시리즈와 지하 1층의 '도서관' 시리즈는 멀리서 보면 두꺼운 마티에르(질감)가 인상적인 유화처럼 보인다.
가까이서 뜯어봐야 한지 위에 먹과 물감 등으로 그린 작품임을 알게 된다.
마티에르처럼 보이는 붓의 흔적 아래에는 한지의 거친 섬유질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일상적인 풍경들을 동양화 기법으로 담아냈던 전작들과는 매우 다른 느낌이다.
작가는 장지를 6 배접한 뒤 물을 흠뻑 적셔서 종이를 불린다. 그런 다음 종이를 철솔로 마구 긁어서 한지를 일으켜 세우고, 먹과 호분(안료의 하나), 물감을 섞어 채색했다.
개막에 앞서 11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이 과정을 "한지를 해체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철솔로 작업한 제 작품이 보여주는 물성은 서양의 마티에르와는 너무 다릅니다. (재료가) 스며 들어가는 한지는 평면 캔버스와 완전히 다른 세계를 갖고 있죠."
조개껍데기를 빻아 만든 호분을 섞어 쓴 것도 호분과 먹의 다른 성질이 "서로 미끄러지고 흔드는" 효과를 냈다.
작가는 "동양 미술이 운필의 담론을 논하며 발전했는데 저는 정서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면서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고 느끼는지, 사물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등 그러한 정서를 확장하는 일종의 방법론이 철솔을 쓰고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법의 변화를 꾀했지만, 그가 놓치지 않는 것은 일상이다.
'방'과 '도서관' 시리즈에서도 빨래며 풍선이며 옷걸이 등이 드러나 있다.
작가는 빨래를 예로 들어 "일상적으로 걸치고 있을 때와 달리 축 처진 모습을 보면서 시간이 축 처진 느낌을 받기도 하고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흔적을 발견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9월 17일까지. 문의 ☎ 02-228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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