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뮤지컬 한류 '명성황후' 미국 진출 20년

입력 2017-08-14 07:30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뮤지컬 한류 '명성황후' 미국 진출 20년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광복 52주년인 1997년 8월 15일은 한국 뮤지컬의 독립기념일이기도 하다. 한국적 소재를 한국인 손으로 극화해 한국인들이 노래하고 연기한 작품이 세계 뮤지컬의 본고장인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 뮤지컬계에선 '캣츠'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넌센스' 등 미국과 영국의 히트작을 번안해 소개하거나 브로드웨이 유명극단의 해외 공연팀을 초청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창작극을 만드는 것 자체가 모험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토종 국산 뮤지컬을 브로드웨이에 진출시키겠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주변의 냉소를 찬탄으로 바꿔놓으며 '한국 연극의 미국 수출 1호'이자 '뮤지컬 한류의 효시'로 기록됐다. 1966년 한국 최초의 창작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가 선보인 지 31년 만의 일이었다.


20년 전 광복절 저녁, 뉴욕 브로드웨이 64번가 링컨센터 뉴욕스테이트 극장에는 유엔 외교사절과 재미동포 등 관객 2천500명이 객석을 채웠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 영상이 흐른 뒤 무대가 밝아지며 1896년 히로시마법원에서 명성황후 시해범들이 재판을 받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난다. 배경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훗날 명성황후로 추존될 민자영은 경복궁에서 고종과 혼례를 올린다. 이어 대원군의 섭정, 고종의 친정, 임오군란, 청일전쟁 등 역사적 사건이 긴박하게 전개된다. 명성황후가 한반도 병탄의 걸림돌이라고 판단한 일본은 '여우사냥'이라는 이름의 작전을 펼쳐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살해하고, 비탄에 잠긴 백성 앞에 명성황후의 혼령이 나타난다.



쓰러졌던 조선 백성들이 일어나 명성황후와 함께 '백성이여 일어나라'를 합창하고 막이 내리자 관객은 8분간 기립박수를 쳤다.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이 "내 박수 소리가 가장 작았다"고 털어놓을 만큼 열광적인 갈채였다. 이날부터 8월 24일까지 이어진 12회 공연에 2만5천 명이 관객이 몰렸다. "하늘에서 황금이 쏟아지듯 비추는 조명, 웅장한 세트, 화려한 의상 등은 관객에게 장엄함이 지닌 아름다움을 일깨웠다"라고 쓴 21일자 뉴욕타임스의 호평은 흥행 가도에 불을 댕겨 이날부터 2천800석이 매진됐다. 극장 대관을 길게 잡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68만 달러의 입장권 매출을 올렸으나 제작비 170만 달러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브로드웨이의 성공을 발판으로 '명성황후'는 새로운 기록에 도전했다. 브로드웨이와 함께 뮤지컬 양대산맥으로 일컬어지는 영국 웨스트엔드에 2002년 2월 1일 처음 진출하며 국내 최초로 영어 버전을 선보였다. 이번에도 적자를 면치 못했지만 의미 있는 시도였다. 2004년 캐나다 공연에서 비로소 흑자를 낼 수 있었다. 2007년 3월 1일 국내 뮤지컬 사상 처음으로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고 전 세계 28개 도시에서 600억 원의 입장 수익을 올렸다. 2009년 10월 8일 일본 구마모토현 가쿠엔대에서는 '명성황후' 특별공연이 펼쳐졌다. 이날은 114년 전 명성황후가 시해된 날이었고, 구마모토현은 시해에 가담한 일본 낭인 48명 중 21명의 고향이었다.





'명성황후'의 브로드웨이 입성은 한국 연극계의 숙원이자 연출가 윤호진의 미국 유학 시절 다짐이 결실을 본 것이기도 하다. 1970년 실험극장에 입단한 그는 연극 '신의 아그네스'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1984년 36살의 늦깎이로 뉴욕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뉴욕 브루클린 슬럼가에서 시계 행상으로 번 돈을 학비에 보태가며 공부했다. 4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며 "내 손으로 만든 뮤지컬을 들고 브로드웨이에 돌아오겠다"고 결심했다. 1991년 국내 최초의 뮤지컬 전문극단 '에이콤'을 창단하고 1994년 '아가씨와 건달들'로 큰 성공을 거두며 뮤지컬 전성시대의 막을 열었다.



'아가씨와 건달들'로 5억 원의 종잣돈을 마련한 윤호진은 을미사변 100주년인 1995년에 맞춰 준비해오던 뮤지컬 '명성황후' 제작에 박차를 가했다. 소설 '사람의 아들'을 극화하며 친분을 다진 동갑내기 작가 이문열에게 원작을 부탁했고 김광림이 원작 '여우사냥'을 각색했다. 작곡은 '레 미제라블'과 '미스 사이공'의 클로드미셸 쇤베르, 의상은 한국계 디자이너 왈라 킴에게 의뢰하는 국제 프로젝트를 구상했으나 제작비 부족으로 포기하고 김희갑·양인자 부부가 작곡·작사를 맡았다. 결과적으로 순국산에 가까워졌다. 편곡은 국제적 흐름에 맞추려고 호주의 피터 케이시에게 맡겼다.



타이틀롤에는 당시 최고의 연극배우로 꼽히던 윤석화가 발탁됐고 서병구(안무), 김현숙(의상), 박동우(무대미술), 최형오(조명) 등 각 분야 일인자들이 스태프로 참여했다. 그러나 제작비 부족 때문에 명성황후 100주기인 1995년 10월 8일 개막하지 못하고 12월 30일 예술의전당에서 초연됐다. 첫날부터 매진 행렬을 기록해 이듬해 14일까지 10회 연장공연에 돌입했고 4월 재공연에 들어가 제작비 12억 원을 다 뽑았다. 다음 목표는 브로드웨이 진출이었다. 돈 문제가 여전히 발목을 잡았으나 윤호진은 "뗏목을 타고라도 가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불태웠다. 김영환 에이콤 후원회장은 집을 담보로 잡혀 제작비를 댔다. 뉴욕 공연에 맞춰 새 타이틀롤을 물색하자 윤석화가 이면 합의를 내세워 소송을 제기했다. 윤호진의 사과로 갈등은 마무리됐고 줄리아드 음악학교 출신의 이태원과 김원정을 더블 캐스팅해 미국 상륙 준비를 마쳤다.





지난 6월 5일 서울 대학로 수현재씨어터에서는 윤호진의 칠순 잔치 '고고 80'이 열렸다. 연극계 주요 인사가 모여 그의 연출 인생을 압축한 명장면들을 감상하며 회고담을 나눴다. 현재 '명성황후'는 내년 3월 공연을 앞두고 오디션을 치르고 있고, 안중근 일대기를 그린 그의 두 번째 브로드웨이 진출작 '영웅'도 전국을 돌고 있다. 그러나 '명성황후' 브로드웨이 진출 20년을 축하만 하기에는 뭔가 허전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윤호진의 뒤를 이어 여러 연출가가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를 노크했으나 '명성황후'만큼 새로운 시도나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20년은 제2, 제3의 윤호진과 '명성황후'가 나오기에 충분한 세월이다. "한국의 뮤지컬인들이여, 일어나라!"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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