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선 할머니 인생 다룬 '풀' 3년 작업 끝에 출간
프랑스어판도 곧 출간…"美·中·日서도 출간됐으면"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김수영 '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다룬 장편 만화 출간을 준비하던 김금숙(46) 작가는 시인 김수영(1921~1968)의 유작을 떠올린 뒤 무릎을 쳤다.
'풀'이야말로 비바람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확한 단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꽃으로 많이들 비유하지만, 꽃이 너무 흔한 상징처럼 되면서 식상해진 면도 있어요. 거리의 풀들을 보세요. 이름도 모르고 짓밟히기도 하지만, 생존의 가치와 의미를 전해주는 존재들이에요."
14일 신간 '풀'을 펴낸 작가를 전화로 만났다.
8·15 광복절을 하루 앞둔 이날은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일을 기려 제정된 '세계 위안부의 날'이기도 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여러 문화·예술 장르에서 다뤄졌는데 똑같은 이야기를 하려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시각을 갖고 다른 차원에서, 인간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싶었어요."
3년간 매달린 끝에 '풀'을 펴낸 데는 일종의 부채의식도 작용했다.
2014년 세계적인 만화 행사인 앙굴렘국제만화축제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다룬 만화들이 전시됐다. 호평받은 작품 중에는 이용수 할머니 증언을 바탕으로 한 그의 단편 '비밀'도 있었다.
"공부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고, 할머니들을 직접 뵙지 못한 채 '비밀'을 만들었다는 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그분들이 얼마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왔겠어요. 쉽게 작업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관련 콘텐츠를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받을수록,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긴 호흡으로 다뤄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관련 자료를 열심히 찾아보면서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도 자주 방문했다.
그곳에서 만난 이옥선(90) 할머니가 '풀'의 주인공이다.
중국 지린성 룽징(龍井)에 살던 할머니가 1996년 55년 만에 고국 땅을 밟는 장면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부산 '옥선이 가시나'가 어떻게 중국까지 끌려가 끔찍한 일을 겪고, 일본 패망 이후에도 여기저기 떠돌며 신산한 삶을 살았는지를 돌아본다.
흑과 백으로 채워져 수묵화 느낌을 내는 만화는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작가는 처음에 만날 때마다 "일본놈들이 나빠, 일본놈들이" "아베가 사죄해야 해"라는 말만 반복하는 할머니를 인터뷰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자그만 방에 단둘이 마주앉아 대화하는 시간이 늘면서 할머니는 멀게는 80여 년 전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뜻있는 일을 한다는 핑계로 할머니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일들을 다시 헤집어놓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도 이번 작업 내내 작가를 따라다녔다.
"할머니가 고통스러웠던 이야기를 하실 때는 저를 보지 않고, 항상 발이라든가 다른 곳을 보셨어요. 질문할 때도 조심스러웠지만, 작업할 때 폭력적인 이미지 자체를 그대로 그려내려고 하지 않았어요. 할머니를 위해 이 책을 만든 것인데 그 기억을 할머니에게 이미지로 남긴다는 건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풀'이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다른 콘텐츠와 구분되는 점이 이 부분이다.
직접적인 이미지는 일본 제국주의 폭력에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할 수는 있으나, 그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책은 16살 이옥선이 겪었던 그 순간을 "침묵하는 검은 페이지"를 통해 강렬하게 고발한다. "기막히고 이제 집에도 갈 수 없게 됐고 세상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마음을 그렇게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어요."
'풀'은 델쿠르 출판사를 통해 프랑스어판으로도 곧 나온다.
작가는 "할머니가 오랫동안 살았던 중국이나 직접 관련된 일본뿐 아니라 영어권에도 이 이야기를 알리고 싶다"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전남 고흥 출신으로 대학 졸업 후 프랑스로 무작정 떠난 작가는 조각가·만화가로 20년 가까이 활동해 왔다.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아버지의 노래', 제주 4·3사건을 다룬 '지슬' 등 현대사의 아픔을 다루는 작업들이 많다.
양국을 오가며 활동 중인 작가는 '아버지의 노래' 청년 시절을 다루는 신작 취재를 위해 현재 프랑스에 머물고 있다.
내달 초 귀국해 이옥선 할머니를 뵈러 갈 계획이라는 그는 지난주 책을 받아든 할머니가 좋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며 기뻐했다.
"어떤 날은 한장도 그리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지난 3년간 하루라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생각을 안 하고 지낸 적이 없었어요. 제 자전적인 이야기였고 첫 단행본이었던 '아버지의 노래'보다 더 가슴 떨리고 뜻깊다는 생각이 듭니다.'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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