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독립 PD의 죽음이 환기한 열악한 외주제작 환경

입력 2017-08-18 07:00   수정 2017-08-18 11:08

두 독립 PD의 죽음이 환기한 열악한 외주제작 환경

독립PD계 "최저임금조차 지급할 수 없는 낮은 제작비에 저작권도 뺏겨"

방송사 "상생방안 찾아왔다" 항변…"자율협의보다 정부·국회 나서야"




(서울=연합뉴스) 이정현 기자 = 최근 두 독립 PD의 안타까운 죽음을 계기로 외주 제작자들의 열악한 제작환경을 이제는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지고 있다.

편성권을 가진 방송사와 방송사에 프로그램을 '납품'하는 독립 PD들의 관계는 대표적인 '갑을' 관계로 인식돼왔다. 방송사의 눈치를 보며 온갖 부당 대우를 참아왔다는 독립 PD들은 두 동료의 죽음으로 한목소리를 내고 나섰다. 제작비는 물론이고, 저작권 보호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열악한 제작환경을 더이상 참지 않겠다는 것이다.

독립 PD들을 위시한 방송계는 오랫동안 곪아온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강제력을 가진 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요구한다.






◇ "제작비 현실 엄혹…편의점 아르바이트보다 못한 열정페이 요구"

독립 PD들은 지난달 14일 남아공에서 EBS 다큐멘터리를 찍다 교통사고를 당한 박환성·김광일 PD의 죽음은 열악한 제작환경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부족한 제작비를 아끼려 무리하게 일을 하다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박환성 PD는 남아공 출국 직전 국가지원금 일부를 EBS가 간접비 명목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206개 외주 제작사가 '방송 불공정관행 청산을 위한 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방송국뿐만 아니라 정부, 국회에 제도 개혁을 요구했다.

이들은 "제작비 현실은 실로 엄혹하기 짝이 없다"며 "지금의 모든 방송사는 최저임금조차 지급할 수 없는 낮은 제작비를 책정하고 모든 권리를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30여년 물가 대비 제작비가 매년 깎이는 비정상적인 현상이 십수년째 이어지면서 꿈을 잃은 PD들은 제작현장을 떠나고 있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보다 못한 열정페이를 요구한다"며 "방송사는 꿈의 직장인 반면, 같은 일을 하는 외주제작 현장은 그 꿈을 진흙탕 속에 파묻고 체념과 포기로 돌아서게 만드는 3D 현장이 돼버렸다"고 밝혔다.

최선영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가 지난 16일 발표한 독립PD들과의 인터뷰 사례를 보면 "제작비로 1억원이 책정돼도 방송국이 송출료로 절반 이상을 가져가니 3천만원으로 작품을 만들 때도 있다", "우리가 협찬을 받아와서 제작해도 원본과 방송본에 대한 저작료는 방송국이 다 가져간다" 등 고충이 실감나게 녹아있다.




◇ "작품마다 동일기준 적용 어려워…상생에 최선 다하겠다"

독립 PD들은 매년 물가인상을 반영해 제작비를 현실화하고, 방송사가 제작·투자하지 않은 작품에 대해서는 외주 제작자의 저작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 정부 제작지원금을 협찬으로 간주하거나 제작사를 복수로 선정해 지나친 경쟁을 조장하는 방송국 관행도 근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방송국들은 말을 아끼면서도 각각 나름대로 상생방안을 찾아왔다고 항변했다.

외주제작 비율이 가장 많은 곳은 역시 지상파다. KBS는 작년 기준 1TV가 28%, 2TV가 51%다.

지상파 한 방송국 관계자는 18일 "외주 제작자와 계약 시 문화체육관광부가 정한 표준계약서를 참고하지만 협의에 따라 수정해 준용할 수 있다"면서도 "드라마, 예능, 다큐 등 장르마다 제작환경이 너무 달라 동일기준을 적용하기 어렵다. 드라마는 외주 제작사가 '갑'인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사례별로 기준이 다 다르니 독립 PD들도 이 문제를 정치권으로 가져가 공론화해보려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타깃이 된 EBS도 "외주제작 비율이 30%가 넘는 만큼 독립PD협회, 언론개혁시민연대와 외주제작사 상생방안, 제작 안전대책, 제작환경 개선에 대해 정기적으로 논의하고 있다"면서도 "2011년부터 외주 제작사에 원본 사용권을 부여했고, 2014년에는 정부지원금의 간접비는 20%까지만 받는 등 상생방안을 실천해왔다"고 강조했다.

한 케이블 채널의 관계자 역시 "외주제작업계 측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상생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을 전했다.






◇ "정부가 외주정책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이렇듯 양측이 자율적으로 입장을 좁히고 합의에 이르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탓에, 독립 PD들은 대표성을 확보할 창구를 만들고 문제를 공론화해 정부 개입을 촉구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송규학 한국독립PD협회 회장이 18일 제31대 한국PD연합회장 선거에 출마한다. 지금껏 지상파 PD들의 '나눠 먹기'로 인식돼온 자리에 도전하는 것으로, PD연합회 사상 최초 경선이 이뤄지게 됐다.

토론회도 이어지고 있다. 17일 한국방송학회 주최로 열린 '방송생태계 독립제작환경 진단을 위한 토론회'에서는 방송계와 학계 전문가가 참여해 외주정책 재검토와 외주제작 시 다자간 계약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오는 24일에는 같은 주제를 다루는 PD연합회 주최의 토론회도 예정돼있다.

독립PD협회와 PD연합회는 '방송 외주제작 생태계 정상화를 위한 공동선언'에 함께한 것을 계기로 향후 활동 계획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우선 공정거래위원회를 통해 EBS 사건을 조사하고 EBS의 위법 행위가 확인되면 검찰에 고발하겠다고 설명했다.

이어 다수 토론회와 간담회 개최, 방송계와 정부기관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대책위원회 구성, 국정감사를 통한 방송국 실태조사 등을 추진한다. 그리고 국회와 협력해 외주 제작자 노동권을 보호하는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밝혔다.

송규학 한국독립PD협회장은 "방송국들이 불공정한 행위를 '갑질'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게 가장 문제"라며 "정부가 외주정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lis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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