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폭압에 배우지 못한 설움…교편 놓자마자 문인화가로
수필 쓴 지 1년 만에 등단 수필집 7권 펴내…신문에 칼럼도
(전주=연합뉴스) 임채두 기자 = "교편을 내려놓기가 무서웠습니다. 교사가 아닌 나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두려움도 잠시 화선지 위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깔끔한 옷차림에 머리가 성성한 노신사는 탁자에 화선지를 펴고 능숙한 손길로 난을 쳤다.
멀끔한 난의 모습이었지만, 성에 차지 않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화선지를 구기기를 몇 차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운 난초에 청록색 꽃이 피었다.
방안을 둘러보니 사군자(四君子)와 연꽃을 그린 문인화(文人畵·전문적인 화가가 아닌 사대부층이 자신의 심중을 표현해 그린 그림)가 곳곳에 있었다.
그는 15년째 문인화를 그리고, 9년째 수필을 쓰는 김길남(82)씨 이야기다.
그는 전북 김제시 난산초등학교에서 20여 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다 2000년 전주 화산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1년 정도 쉬다 여류서예가 중 손꼽히는 문인화가 람곡 하수정 화백을 만나 문인화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일주일에 한 차례 하 화백에게 한 수 배울 때를 제외하고 집에서도 시간만 나면 붓을 들었다.
화선지 수천장을 버려야 한 작품이 완성되기 때문에 절로 예술혼이 불탔다.
주로 연꽃을 화폭에 담았다.
진흙에서 자라면서도 탁한 물에 물들지 않는 고결한 모습이 좋아서다.
김씨는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더러운 물에 물들지 않고 깨끗하고 곧게 뻗어난다"며 "연꽃은 군자를 상징하는데, 연꽃처럼 고결한 선비의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주로 연꽃을 그린다"고 설명했다.
그가 교편을 내려놓고 붓과 벼루를 든 이유는 어렸을 적 가지 못한 길에 대한 갈망이었다.
유년시절 서당에 다녔던 김씨는 일제의 '서당 사냥'때문에 배움터를 잃었다.
서당에 들이닥친 일본 순사들은 갖가지 이유를 대며 교육을 막았고 서당에 들어서는 아이들에게 총칼을 들이댔다.
손에서 붓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는 어렸을 적 배우지 못했던 서예에 미련이 남았다. 유년시절의 갈망을 수십 년이 지나 노년이 돼서야 겨우 풀 수 있었다.
그림에서 글로 점차 발을 넓혔다.
2008년부터는 안골노인회관과 전북대 평생교육원에서 수필공부를 시작했다.
매주 한 편씩 수필을 써낼 정도로 열성 만학도였다.
그해 겨울 '대한문학'에 '내 고향, 그 그리운 장뜰'이라는 작품으로 등단했다.
수필에 눈을 뜬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거둔 뜻밖의 성과였다.
등단 이후 매년 수필집을 펴내면서 글의 소재도 고향과 가족, 친구 등에서 지역사회와 이념, 정치, 사회개혁 등으로 확장했다.
현재 전북 지역 2개 신문사에 칼럼을 연재할 정도로 지역사회에서 '글쟁이' 대접을 받는다.
지금은 글과 그림으로 하루를 바쁘게 보내지만 그도 평생 몸담았던 교단을 떠날 때는 세상이 두려웠다고 한다.
'퇴직 후에 할 일이 없어 집에만 있으면 어쩌나'하는 누구나 할 법한 걱정을 했다.
존경받는 교사에서 하루 새 하릴없는 백수가 되는 일은 날개 없는 추락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노년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때가 많았다. 연금 덕에 먹고 살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지만,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 두려웠다"며 "교사 선배들께 조언을 구하러 다니던 때가 눈에 선하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학교 울타리 밖 세상은 넓었다. 지금은 문인화를 그리고 수필을 쓰면서도 주민센터와 시청에서 마련해준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며 "풍수지리, 농악을 배우느라 눈코 뜰 새 없는 하루가 매일 펼쳐진다"고 했다.
d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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