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G "원세훈, 정보분야 경험 부족"…3대 '병적증상' 지적
보고서 각주에 "국정원 직원 사기 저하로 약 10명 자살" 기록
국정원 사정 밝은 관계자 "원세훈 시절 정보기관 본연 역할 위협받아"
(서울=연합뉴스) 노효동 장용훈 임형섭 박경준 이동민 기자 = 지난 2014년 발간된 국제위기그룹(ICG)의 한 보고서가 최근 국가정보원 개혁과 맞물려 3년만에 다시 주목받고 있다.
원세훈 국정원장 재임 시절을 중심으로 국정원 조직 내부가 앓았던 '병적 증상'을 제3자인 국제 비영리기구의 관점에서 지적해낸 것이어서 앞으로 국정원이 어떻게 바뀌어나갈 것이냐에 대한 방향타를 제공하는 측면이 있다는 평가다.
특히 원 전 원장 재임 기간 '약 10명'의 국정원 요원이 사기 저하로 자살했다는 미확인 내용까지 실렸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지면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벨기에에 본부를 둔 분쟁예방 비영리조직인 ICG(International Crisis Group)는 2014년 8월 '한국 정보기관 병적증상의 위험성(Risks of Intelligence Pathologies in South Korea)'이라는 총 45쪽 분량의 보고서를 펴냈다.
미국 트로이대학의 북한 군사문제 전문가인 대니얼 핑크스턴 교수가 작성한 보고서의 핵심은 당시 국정원이 앓았던 3대 '병적증상', 즉 ▲정보활동 실패 ▲정보의 정치화 ▲국내 정치개입이다.
ICG는 이 같은 국정원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로 원 전 원장이 정보 분야에 밝지 못했다는 점을 꼽았다.
보고서는 "정보 분야와 관련한 원 전 원장의 경험 부족은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에게도 명백한 부분이었다"며 '원세훈이 능력 밖의 일을 맡았고 정보기관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는 전직 고위관료의 발언을 인용했다.
이 전직 고위관료는 심지어 '원세훈이 제공한 정보는 썩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해서 다른 자료와 정보들을 찾아봤다'고까지 말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보고서에는 "원 전 원장이 청와대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 고위관료들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이 붕괴 직전이니 갑작스러운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며 "참석자들이 그 근거를 물었지만 원 전 원장은 아무것도 대지 못했다"고도 적혀 있다.
보고서에 직접 적시돼 있진 않지만 원 전 원장의 인사스타일도 이 무렵 국정원 조직의 '건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요인이라는 해석이 가능해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또 다른 소식통은 원 전 원장 시절 국정원의 사기가 곤두박질쳐서 약 10명의 국정원 요원이 자살을 했다고 말했다"는 보고서 각주의 내용은 국정원 조직내 사기와 요원들의 극단적 선택 사이의 연관성을 거론하고 있다.
실제로 국정원 사정에 밝은 한 소식통은 24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자기 업무 배제 등으로 우울증에 걸려서 자살한 사람이 수명에 달하는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물론 보고서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해도 원 전 원장의 재임 또는 인사스타일과 관련이 있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다만 원 전 원장 재임 중 이 같은 사례가 유독 많이 발생했다면 이는 당국 차원의 보다 정확한 진상규명과 과학적 분석작업을 필요로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대해 원 전 원장 측은 "오히려 여러 직원을 적재적소에 쓰고 자기 전공 분야를 갖게 하려고 많이 노력했다"며 "보고서의 내용은 사실무근"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ICG는 보고서를 통해 원 전 원장 재임 중의 국정원뿐만 아니라 이후 국정원의 내부 개혁과 관련한 행보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ICG는 보고서가 나올 무렵인 2014년에 국정원이 연루됐다는 의혹과 함께 국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들을 국정원의 대표적인 정보활동 실패 사례로 열거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유출을 비롯해 2012년 대선 당시 온라인 뉴스에 박근혜 후보에게 유리한 내용의 댓글을 다는 데 국정원이 동원된 의혹 등이다.
2013년 말 국정원 개혁 작업과 관련해서는 "2013년 12월 남재준 원장은 자체 개혁안을 발표하면서 법 개정은 필요 없고 내부 조치만 요구된다고 했다"며 "한 페이지 반짜리 문서로 요약된 개혁안에는 네 가지 포인트가 담겼다"고 설명했다.
당시 국정원이 국회에 보고한 자체 개혁안은 국회·정당·언론사 정보관(IO) 상시출입 제도 폐지, 전(全) 직원 정치개입 금지 서약 제도화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때 여야는 사이버심리전 처벌을 명문화하는 등의 별도의 국정원 개혁안에도 합의했다.
개혁안을 실행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이보다 8개월이 지난 뒤에 나온 보고서는 국정원 개혁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ICG는 "여당인 새누리당 소속의 대통령과 국정원의 관리자들은 국정원의 진지한 개혁에 관심이 없다"면서 "(국정원 개혁은) 자신들의 권력이 축소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국회에서 국정원이 보고한 주요 정보가 새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보고서는 "(대한민국) 국회는 정보 유출로 악명이 높다"면서 전직 의원의 말을 인용해 "국정원이 국회의원에게 말해주는 정보는 거의 다 새기 때문에 국정원도 (의도적으로) 누설되기 원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정보를 숨긴다"고 적고 있다.
결국 ICG가 보고서에서 언급한 문제들을 요약하면 정보기관의 역할과 운영에 밝지 않았던 원 전 원장이 국정원 조직을 퇴보시켰고 이를 바로 잡으려는 후속 조치도 미흡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국정원의 자체 개혁안도, 여야가 2013년 말에 합의한 '국정원 개혁안'도 공염불에 그친 탓에 정권이 한 번 더 바뀌고 나서야 정치개입 의혹과 관련한 근본적인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만약 보고서의 내용대로 지금까지 제기된 원 전 원장의 정치적으로 편향된 지시뿐만 아니라 정보기관 역할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한 문제까지 드러난다면 국정원 개혁작업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국정원 내부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 24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원 전 원장이 '역량이 부족했다'는 지적은 이미 내부서도 나왔던 얘기"라면서 "원 전 원장 하에서 국정원이 정보기관 본연의 역할이 위협받았다고 봐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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