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한양대 교수, 미지의 인물 '조옥파' 추적한 논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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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옥파(趙玉坡) 군은 이름난 진사로 훌륭한 붓글씨 솜씨를 갖추고 있다. 사신의 임무를 받들어 중국에 와서, 지금은 귀국을 늦추고 수레를 타고 승경을 유람한다."('점석재화보' 중 '한묵인연')
"알렌 목사의 집에서 양저우(楊州)에 사는 조옥파와 만났다. (중략) 이곳에 온 연유를 따져 물으니, 그의 대답이 이러했다. '몇 해 전 아들을 잃고 (아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는데,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아들이 잉커우(營口)에 있다고 하더군요.'"(윤치호 일기 중 일부)
두 글 속에 등장하는 조옥파는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19세기 후반 중국 양저우 지역에서 활동한 조선인이다. 그가 남긴 뛰어난 서예 작품은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그의 생몰 연도와 생애는 확인되지 않았다.
한문학자인 정민 한양대 교수는 계간지 '문헌과 해석' 최신호에서 미지의 인물인 조옥파의 실체를 탐구한 논문을 발표한다고 28일 밝혔다. 그는 이 논문에서 조옥파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모아 공개했다.
정 교수는 "중국에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조옥파는 한동안 양저우에 머물며 많은 글씨를 남겨 지역 문화계에 가화(佳話)의 주인공으로 기억되고 있다"며 "그의 서예 작품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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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옥파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실린 중국 서적은 '점석재화보'(點石齋畵譜)다. 이 책은 상하이에서 1884∼1898년에 간행된 '신보'(申報)의 부속 연재물을 모아 엮은 것이다.
점석재화보에는 그림과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담겼는데, 조옥파는 '이필대설'(以筆代舌)과 '한묵인연'(翰墨因緣), '한사청유'(韓使淸遊) 등 세 그림에 나온다. 그림 속에서 조선 옷을 차려입은 조옥파는 중국 관리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글씨를 쓰고 있다.
정 교수는 "점석재화보의 기록을 살펴본 결과, 조옥파는 조선의 사신 자격으로 중국에 왔다가 관광을 위해 운하를 따라 남쪽 지역을 돌아봤다"며 "그는 여러 지역에서 유력가의 집을 방문해 글씨를 선물하며 교유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조옥파는 조선 관복을 입고 다녀 중국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에게 선물을 받은 유력가들은 이에 상응하는 답례품을 건네며 융숭하게 대접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개화기 인물인 윤치호(1865∼1945)가 쓴 '윤치호 일기'에는 점석재화보와는 크게 다른 기록이 실려 있다.
윤치호는 상하이에서 공부할 당시인 1885년 7월 21일(음력)에 조옥파를 만났다고 적었다. 윤치호는 조옥파가 아들을 찾기 위해 중국에 왔고, 외국인 목사에게 여비를 빌려 달라고 청할 정도로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다고 밝혔다. 결국 윤치호는 "절조를 지키는 사람처럼 보였다"는 이유로 자신의 돈을 빌려줬다.
이와 관련해 정 교수는 조옥파가 중국 선비 장함중(張涵中)의 시집 '감회재분체시록'(鑑悔齋分體詩錄)에 써준 서문에도 박명한 자식을 찾아서 왔다는 뜻의 방아박명(訪兒薄命)이라는 구절이 있다고 소개했다.
정 교수는 "한결같이 조선의 사신으로 중국에 왔다가 공무를 마친 후 관광을 위해 체류했다고 했던 조옥파가 장함중과 윤치호에게는 아들 때문에 중국에 건너왔다고 했다"며 "여러 기록을 검토하면 조옥파는 1885년 7월 이전부터 양저우에 머물렀고, 이후 상하이로 가 윤치호와 대면했으며, 다시 난징(南京) 등을 거쳐 양저우에 돌아와 상당 기간 체류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조옥파가 한중 문화 교류의 첨단에 섰던 사신 출신의 서예가였는지, 아니면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사신이라고 칭하며 중국 남부를 떠돌던 사기성이 농후한 예술가였는지는 알 수 없다"면서 "당시 중국 문화계에 깊은 인상을 남긴 조옥파에 대한 추적은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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