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 입증 가로막는 기업에 불이익…'증명 책임' 중심축 고용주로 점차 이동
(서울=연합뉴스) 방현덕 기자 = 대법원이 29일 내놓은 삼성전자 LCD 공장 노동자 희귀질환 산업재해 판결은 산재 인정의 조건인 질병-업무 상관관계에 대한 증명 책임의 중심축을 노동자에서 고용주 쪽으로 한 걸음 이동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첨단산업군에서 벌어지는 업무상 재해 사건의 재판 상당수에서 기업 측은 '경영상 비밀'을 내세워 법원이 요구하는 근로 여건이나 유해물질 사용 여부 등을 꼭꼭 숨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노동자로서는 자신이 어떤 연유로 희귀한 질환을 얻었는지 알 길이 없어지는 전형적인 '봉쇄전략'이다. 이런 현실 아래에서 법원은 그간 "질병-업무 상관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며 노동자 패소 판결을 내려 노동계의 비판을 받았다.
통상의 소송에선 피해 사실을 주장하는 쪽이 이를 증명하는 게 원칙이다. 제조물책임·환경소송 등에서 일부 예외적으로 가해자 측이 원인을 유발하지 않았다거나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책임을 지도록 증명 책임을 전환·완화해준다.
이번 사건에서도 삼성전자와 근로복지공단 측은 LCD 공정에서 취급하는 유해화학물질 종류, 안전검사 실시 현황, 화학물질 누출 시 배출처리 시스템 현황, 보호구 지급 현황 등에 대한 공개 요구를 모두 거부했다.
공단의 의뢰로 실시한 역학조사는 근로자가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된 수준을 측정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부실'로 지적됐다.
그런데도 1·2심은 "질병과 업무 사이의 상관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며 희귀질환 '다발성 경화증'이 발병한 원고 이모(33)씨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이 이 같은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대법원은 "근로자에게 발병한 질병이 희귀질환이나 새로운 유형의 질환에 해당하고 그에 관한 연구 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현대 의학·자연과학으로 인과관계를 명확히 규명하는 것이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사업주의 협조 거부, 관련 행정청의 조사 거부·지연으로 유해요소 종류와 노출 정도를 특정할 수 없었다는 특별한 사정이 인정된다면, 이는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법원 관계자는 "그간은 '자료 미비로 질병 원인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이 사업주의 손을 들어주는 이유가 됐다면, 이제는 같은 상황에서 노동자의 손을 들어줄 수 있다는 매우 진보적인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산재 피해자·유가족 모임인 시민단체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에 따르면 현재까지 삼성전자 반도체·LCD 생산라인 노동자에게 발생한 백혈병, 유방암, 뇌종양, 난소암, 재생불량성 빈혈, 다발성 신경병증, 다발성 경화증, 악성림프종 등이 법원과 근로복지공단에서 직업병으로 인정됐다.
하이닉스 등 관련 업체까지 합하면 모두 21명의 노동자의 산재 인정이 확정됐다. 그러나 이는 접수된 피해 사례 400여 건에 견줘 미미한 숫자라고 반올림 측은 전했다.
banghd@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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