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법원이 기아자동차 근로자들에게 지급된 정기상여금과 중식비를 '통상임금'으로 인정하고, 근로자들에게 밀린 임금과 이자 4천224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권혁중 부장판사)는 31일 기아차 노조 소속 2만7천424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기아차의 정기상여금과 중식비가 정기적·일률적·고정적으로 지급돼온 점을 들어 통상임금으로 인정했다. 또 정기상여금 등이 포함된 통상임금으로 재산정한 연장근로수당을 비롯한 각종 수당의 3년 치 미지급분 3천126억 원과 지연이자 1천97억 원 등 총 4천223억 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이는 노조 측이 청구한 1조926억 원의 38.7%에 해당하는 것이다. 여기에다 2014년 추가로 대표소송을 나선 13명에게도 1억2천여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시해 청구 금액의 감액에도 소급 비용 규모가 1조 원 안팎에 달할 것이라는 게 사측 주장이다. 1심 결과이기는 하나 기아차로서는 적지 않은 부담을 안게 됐다.
이번 소송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정기상여금 등이 통상임금에 해당하는지와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이 적용되는지였다. 지난 2013년 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자동차 부품업체인 갑을오토텍의 통상임금 소송에서 '고정적·일률적·정기적'으로 지급된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된다고 판결한 바 있어 기아차의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으로 인정될 것으로 어느 정도 예견됐다. 다만 재판부는 노조 측 요구 중 영업활동 수행을 조건으로 지급되는 일비는 '고정성'이 없다는 점을 들어 통상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측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한 것은 노사합의에 따른 것임에도 추가수당을 요구해 경영에 중대한 어려움을 초래하는 것은 '신의칙'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기아차 측이 예측하지 못한 재정적 부담을 안을 가능성은 인정했지만 경영상 중대한 어려움이 초래되거나 기업존립이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2008년부터 2015년 사이에 지속해서 상당한 당기 순이익을 거뒀고 순손실은 없었다는 점이 근거가 됐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근로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했을 임금을 이제야 지급하는 것을 두고 비용이 추가로 지출된다는 점에만 주목해 이를 중대한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옳은 지적이고 근로자의 정당한 권리 보호를 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과 자동차업계를 겨냥한 미국의 통상압력 등으로 초래되는 자동차업계의 어려움은 과거의 경영지표가 아니라 이제부터 반영될 것이라는 현실적 고려도 이뤄졌는지 궁금하다.
이번 판결은 문재인 정부 들어 통상임금 관련 첫 판결이다. 소송 자체에 걸린 액수도 크지만 자동차업계는 물론 산업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끌어왔다. 2013년 이후 지난 6월 말까지 통상임금 소송을 겪은 100인 이상 사업장은 전국 192개에 달하고 이 중 115곳은 여전히 소송 중이라고 한다. 정기상여금이 정기성·일률성·고정성의 원칙에만 맞으면 통상임금으로 인정되는 것은 이미 흐름으로 잡힌 것 같다. 다만 신의칙이 적용되는지는 재판부에 따라 달라져 명확한 기준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소송에서는 신의칙이 적용되지 않았지만 금호타이어 근로자들이 낸 최근 소송에서는 2심인 광주고법이 신의칙을 받아들여 미지급 수당을 줄 필요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이 갑을오토텍 판결에서 '경영상 중대한 어려움'이나 '기업존립 위태'를 신의칙 적용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하급심에서 재판부에 따라 판단이 엇갈리는 만큼 명확한 기준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최근 국내자동차업계가 어려움에 부닥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도 기아차 사측은 재판 과정에서 명확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아, 신의칙이 배제되는 이유 중 하나로 지목됐다. 사측이 항소하기로 한 만큼 상급심에서 어떻게 나올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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