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민이 영웅이라 했던 남편 구본주…힘든 이들, 조각 봤으면"

입력 2017-09-03 08:30  

"소시민이 영웅이라 했던 남편 구본주…힘든 이들, 조각 봤으면"

아내 전미영씨가 떠올리는 요절한 천재 조각가…아라리오 제주서 추모전

대표작 '아빠의 추억'부터 유작 '별이 되다'까지 전시




(제주=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여기, 위태로워 보이는 남자가 있다.

만취한 남자는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볼일이 급했는지, 벽에 겨우 몸을 의지해 지퍼부터 내렸다. 한 손에는 담배를 쥔 채 반쯤 풀린 눈으로 어딘가를 곁눈질하는 남자의 눈에는 쓸쓸함과 슬픔이 묻어있다.

제주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조각가 구본주(1967~2003)의 대표작 '아빠의 청춘'(2000)이다.

벽에 짓눌린 눈가의 주름, 축 처진 입꼬리, 반질반질한 양복은 삶의 고단함을 전한다. 무엇보다 투박한 나뭇조각들을 모아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료와의 치열한 투쟁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뜻밖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올해로 쉰이 됐을 천재 조각가를 추모하는 전시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이 과장의 이야기-아빠 왔다'가 제주 아라리오뮤지엄에서 개막했다.

고인의 아내이자 동료 조각가인 전미영(49) 씨도 2일 전시장을 찾았다. 남편이 생전에 머물렀던 경기도 포천의 작업장에서 매일같이 봐온 조각들이지만, 그는 마치 새로운 작품을 대하듯 찬찬히 둘러봤다.





"남편은 감동을 주는 조각을 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어요. 남편이 8남매 중 막내여서 아버지와 나이 차가 많이 났거든요. 아버지부터 어린아이까지 이해하고 지지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작품 아니겠냐고 했죠."

두 사람은 각각 홍익대 조소과, 성신여대 조소과 학생으로 만나 연인이자 동료가 됐다.

구본주의 작업은 엄혹한 시대에 더 팍팍한 삶을 살았던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삶을 직설적으로 고발했다. 3층에 놓인 1990년대 초 '파업' 연작 등이 그때 작품이다.

당시를 회상하던 아내는 "왜 민중미술은 걸개그림과 판화밖에 없을까 생각하던 차에 남편의 조각을 보고 정말 천재라고 생각했다"며 웃음을 지었다.

구본주의 작업은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노동하는 인간을 여전히 화두로 삼았지만, 그중에서도 샐러리맨을 주목했다. 개인적으로는 결혼 후 가정을 꾸린 점과 사회적으로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찾아온 점이 작용했다.

'아빠의 청춘'(2000)과 사력을 다해 해고를 피하려는 인간을 표현한 '위기의식 속에 빠진 그는'(1999) 등 전시장 2층에 놓인 작품들이 이때 제작됐다.

"남편은 '영웅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을 영웅화하는 작업을 내가 하겠다'고 했어요. 작가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보러왔으면 좋겠어요. 남편 작품은 '우리 모두 힘들게 살고 있어' '너가 바로 영웅이야'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거든요."






비슷한 시기 작업 기법도 변화를 겪는다. 아내는 "초기에는 샌더나 밀러, 빽빠(사포) 등 기계를 많이 써서 내용을 빨리 뽑아냈다면 나중에는 손을 써서 작업했다"면서 "후반부 작품에는 노동이 주는 감각적인 느낌들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부부 생활을 살짝 들춘 '깨소금'(2002) 등 삶의 풍경을 포착한 5층 조각들 앞에서는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4층 전시장을 채운 설치 조각 '별이 되다'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남긴 3개의 조각과 유족, 제자, 동료가 만든 997개의 조각을 더해 완성한 작품이다.

아내는 "지금도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있고 작품들이 있으니 여전히 생명으로 살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거칠고 투박한 노출 콘크리트로 된 동문모텔∥ 전시장은 구본주 작품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층마다 이야기가 넘치는 전시 관람을 마치고 내려오면, 한 편의 연극을 보고 나온 느낌이 든다.

이번 전시는 2018년 9월 30일까지 계속된다. 1일 개막한 국제미술전 '2017 제주비엔날레' 전시장 중 한 곳인 알뜨르비행장 초입에서도 작가의 '갑오농민전쟁'(1994)을 감상할 수 있다.

단색화가 김태호 개인전 '호흡', 제주 몽돌을 주제로 작업하는 문창배 개인전 '몽돌의 노래'도 각각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와 동문모텔|에서 열린다.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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