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의 시선] 여성 참정권이 걸어온 길

입력 2017-09-14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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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여성 참정권이 걸어온 길

(서울=연합뉴스) 1893년 9월 19일.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시민혁명을 주도했던 유럽이나 미국이 아닌 영국의 식민지 뉴질랜드에서였다.

식민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뉴질랜드에는 1853년부터 선거로 선출한 하원이 있었고, 일정 규모 이상의 재산을 가진 유럽인 남성들은 투표권을 가졌다. 1879년 모든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됐고, 1893년에는 여성들도 투표의 권리를 행사하게 된 것이다.

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뉴질랜드 여성들의 오랜 노력이 필요했다.

여성 투표권 획득에 앞장선 대표적인 여성단체는 케이트 셰퍼드(Kate Sheppard)가 이끄는 '기독교여성금주동맹(Women's Christian Temperance Movement)'이었다. 원래 술 판매 금지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단체는 셰퍼드의 주도로 수차례에 걸쳐 여성 투표권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영국 리버풀 출신의 셰퍼드는 스무 살에 대서양을 지나 태평양을 건너는 긴 항해 끝에 뉴질랜드로 이주했다. 여성단체를 통해 음주, 성적 억압과 착취 등 사회 문제를 여성적 관점에서 풀어나가던 셰퍼드는 여성의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투표권 확보 투쟁에 나섰다.

1888년 처음으로 여성 투표권 도입을 의회에 정식으로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1891년 9천 명의 서명이 담긴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역시 의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892년 2만여 명의 서명을 받은 청원이 제출됐을 때 하원은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으나 상원은 거부했다. 1893년 뉴질랜드 거주 유럽인 성인 여성인구의 4분의 1에 가까운 3만2천여 명의 서명이 담긴 청원을 제출했고,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용하는 법안이 9월 8일 의회에서 찬성 20, 반대 18로 가까스로 통과됐다. 마침내 9월 19일 총리가 법안에 서명하면서 뉴질랜드 여성들은 승리를 거두게 됐다.

그러나 이는 여성들에게 선거권이 보장된 것일 뿐 뉴질랜드에서 여성에게 피선거권이 주어진 것은 30년 가까이 지난 1919년에 이르러서였으며, 그나마 여성 의원이 탄생한 것은 1933년이 되어서였다. 첫 여성 의원이 의회에 등원한 이듬해 셰퍼드는 눈을 감았다. 현재 뉴질랜드의 10달러짜리 지폐에는 셰퍼드의 얼굴이 담겨있다.

'1893년 여성의 참정권 탄원서(The 1893 Women's Suffrage Petition)'로 불리는 이 청원서는 당시 뉴질랜드는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청원서로, '여성이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졌고, 투표권은 남성만의 권리가 아닌 인간의 권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고, 현재 수도 웰링턴의 뉴질랜드 고문서보관소에 원본이 보관돼 있다.





뉴질랜드에 이어 1902년 호주, 1906년 핀란드, 1913년 노르웨이, 1915년 덴마크가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1917년 소비에트 연방, 1918년 캐나다, 1919년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도 여성 참정권이 도입됐다.

미국에서는 1869년 와이오밍주, 1890년 워싱턴주, 캘리포니아주, 애리조나주, 캔자스주, 오리건주, 1893년 콜로라도주, 1896년 아이다호주, 유타주 등이 차례로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 연방정부의 헌법 수정안이 상하 양원을 통과, 1920년 21세 이상의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획득하게 됐다. 1870년 흑인 노예에게 참정권을 줬던 미국은 이때야 여성 참정권을 받아들인 것이다.

영국에서는 1903년 에멀리 팽크허스트의 주도로 '여성사회정치연합(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이 창설돼 집회와 선전활동, 낙선운동 등을 전개하여 1918년 국민대표법 통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체포와 구금이 잇따랐고, 투옥된 여성운동가들은 정치범 대우를 요구하며 옥중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팽크허스트는 1908년 처음 수감된 이후 1913년 한 해에만 12차례 체포와 석방을 되풀이했다. 국민대표법은 21세 이상 모든 남성과 일정 자격을 갖춘 30세 이상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내용이었다. 1928년에서야 영국 여성들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이 부여됐다.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해부터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다. 1793년 당시 입법기관이었던 국민공회는 여성들의 집회를 전면 금지했고, 여성단체는 모두 해체됐다. 프랑스의 여성 참정권 운동은 19세기 말 영국과 미국 여성운동의 영향을 받아 다시 활발해졌고 1946년에야 법적으로 여성 참정권이 보장됐다.

1920년대 미얀마(1922), 에콰도르(1929)에서 여성 참정권이 도입됐고, 1930년대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1930), 태국과 우루과이(1932), 터키와 쿠바(1934), 필리핀(1937)에서 여성들이 이 권리를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서 독립과 민주주의의 도입과정에서 여성들이 참정권을 갖게 됐다. 1945년 패전국 일본, 1946년 중국과 북한, 1949년 인도에서 여성들이 참정권을 행사하게 됐다.







한국은 1948년 제헌헌법에서 남녀의 평등한 참정권이 보장됐다. 제헌헌법 제25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공무원을 선거할 권리가 있다," 제26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공무를 담임할 권리가 있다"라고 명시하여 남녀의 차별 없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1948년 5·10선거부터 보통선거가 실시됐다. 그 후 9차례에 걸쳐 헌법이 개정됐으나 참정권에 관해서는 변동이 없었다.

유엔이 '여성 참정권 협약'을 채택한 것은 1952년의 일이다. 서방 국가 중에서는 스위스 여성들이 1971년에야 참정권을 획득했다.

1990년대에는 카타르(1999), 2000년대에는 오만(2003), 쿠웨이트(2005), 아랍에미리트(2006), 부탄(2008) 등에서 여성 참정권이 도입됐다. 그리고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국 83년 만에 비로소 여성 참정권이 보장됐다.







이로써 전 세계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지 않는 국가는 특수 사례로 바티칸 시국 단 한 곳만 남았다. 교황은 투표를 통해 선출되지만, 투표권은 바티칸 주민들이 아니라 전 세계의 추기경에게 있으므로 바티칸 주민들은 남성이나 여성이나 투표권이 없다.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았던 것은 여성은 남성보다 능력이 떨어지고, 여성의 본분은 가정을 지키는 것이며, 여성의 이익은 남성이 알아서 대변한다는 남성들의 편견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들을 제외하고 어느 국가에서도 여성들의 강력한 행동 없이 여성 참정권이 실현된 곳은 없었다. 이 기본적인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긴 세월 여성들의 투쟁이 필요했고 적지 않은 희생이 요구됐다.

후발국가에서 민주주의의 형태를 갖추다 보니 치열한 노력의 과정 없이 얻게 된 여성 참정권. 우리도 이에 해당한다. 초기에는 자신이 가진 권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하지 못하고 고무신, 막걸리에 이를 팔아넘겼던 부끄러운 기억들이 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국민의 기본권인 참정권을 누리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 권리를 얻기 위해 여성들은 오랜 시간 힘겹게 싸워야 했다. 여성 참정권의 의미를 생각하고 이러한 권리를 소중하게 행사하는 것이 이를 위해 일생을 바쳐 노력한 여성들을 기리는 길이 될 것이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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