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호 서울대 명예교수 주장 "태조와 최승로의 인식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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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불교문화, 유교문화와 함께 고려시대 문화를 구성하는 3대 요소였던 '토풍'(土風), 즉 토착문화의 영향력에 대한 평가가 근현대 역사 연구 과정에서 크게 축소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노명호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지난 15일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이 주최한 학술지 '대동문화연구' 100호 발간 기념 학술대회에서 태조 왕건(877∼943)의 유훈과 최승로(927∼989)의 시무 28조에 드러나는 고려의 문화 정책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학계의 통설을 비판했다.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는 태조가 943년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훈과 최승로가 982년 성종에게 올린 개혁안인 시무 28조에 나타난 당풍(唐風, 중국 문화)과 토풍에 대한 시각이 대체로 같다고 주장해 왔다.
이와 관련해 태조 유훈 4조는 "우리 동방이 예부터 당풍을 동경하여, 문물예악(文物禮樂)은 남김없이 그 제도를 따르는데, 지역이 다르고 인성(人性)이 각기 다르므로 반드시 같을 필요는 없다"고 규정했다.
한편 최승로는 시무 28조 중 11조에 "화하(華夏·중국)의 제도는 준수하지 않을 수 없으나, 사방의 습속이 각기 지역에 따라 다르니 모두 변화시키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적었다.
이에 대해 노 명예교수는 "태조는 문물예악 전반에 걸쳐 당풍의 좋은 점은 받아들이되 동방의 사람과 실정에 맞게 토풍에서도 살릴 것은 살려야 한다고 봤지만, 최승로는 토풍은 비루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당풍으로 모두 교체해야 하나 경제적으로 바꾸기 어려운 거마의복(車馬衣服)만 토풍에 의거하자고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통설을 따르면 태조가 추구한 토풍은 거마의복에 한정돼 고려 초기 문화의 나머지 영역은 당풍에 의존한 것이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노 명예교수는 "언어를 비롯한 각종 생활문화, 민간예술에는 엄연히 고려의 토풍이 존재했다"며 "유교 윤리와는 구별되는 토속적 효(孝)도 있었다"고 역설했다.
이어 "토풍의 비중이 축소되면서 토풍에 대한 자료가 제대로 검토되지 않고 심화한 연구도 나오지 않았다"고 지적한 뒤 "그 결과 고려사에 관한 개설서는 유교문화와 불교문화 중심으로 서술되고, 토풍에 관한 내용은 미미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학계에서 태조와 최승로의 문화 정책 방향을 동일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태조 유훈은 본래 후대의 임금에게 은밀하게 내려진 일종의 국시(國是)였는데, 최승로가 성종에게 이를 전해 듣고 원론적인 내용만 가져왔다는 것이다.
노 명예교수는 "최승로는 성종을 설득하기 위해 태조 유훈과의 차이를 정면으로 노출하기보다는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 꼬집었다.
유교문화를 중시한 최승로의 정책은 대부분 실행됐다. 태조가 존속을 강력히 바랐던 팔관회와 연등회는 성종 6년(987) 사실상 폐지됐고, 그 대신 당풍인 사직(社稷)과 적전(籍田·임금이 신에게 바칠 제물을 조달하기 위해 경작하던 땅)이 시행됐다.
노 명예교수는 "급진적인 중국풍이 유입되면서 생활문화에까지 확대돼 고려사회의 친족제도와는 전혀 맞지 않는 중국 상례인 오복(五服·망자와의 혈통에 따라 5가지로 구분되는 유교식 상복제도)이 도입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노 명예교수는 1992년 현릉 확장 공사 도중에 왕건 동상이 출토됐을 때도 학계에서 토풍 문화를 의식하지 않았던 탓에 몇 년간 토속 제례품인 이 동상을 '청동불상', '현릉 부장품'으로 여겼다고 지적하면서 "개념체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않으면 사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시대상을 왜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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