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들, 민원인과 식사 꺼리고 고급식당 발 끊어…교사들은 간식·선물 사절
대학생은 교수에게 선물 대신 '감사 이메일'…'란파라치' 실적은 전무
(서울·세종=연합뉴스) 이율 양정우 임기창 이재영 기자 = "가장 큰 변화요? 민원인들이 박카스나 비타500을 사 오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더라고요."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근무하는 한 공무원에게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 일명 '김영란법') 시행 이후 무엇을 가장 큰 변화로 여기는지 묻자 이런 답변이 나왔다.
과거에는 청사를 방문한 외부인들이 담당 공무원에게 건넬 음료수 박스를 두세 개씩 들고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흔히 눈에 띄곤 했다. 지금은 이런 풍경을 찾아보기 어렵다.
세종시에 있는 정부세종청사 역시 민원인이나 기업 대관업무 관계자 방문이 눈에 띄게 줄었다. 전처럼 음료수나 간단한 선물을 들고 방문하는 이들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청탁과 접대가 일상적이던 공직사회 문화를 근본부터 바꾸고자 곡절 끝에 도입된 청탁금지법이 오는 28일 시행 1년을 맞는다.
영세·중소기업이나 식당업계, 축산농가, 화훼농가 등이 상당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며 부작용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공직사회 곳곳에서는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유의미한 변화가 감지되는 등 법이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모습이다.
◇ 민원인과 밥 안 먹고 비싼 식당 안 간다…공직사회 변화 중
관가에서는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크고 작은 변화가 눈에 띈다. 업무와 관련된 민원인과 식사하는 일 자체가 눈에 띄게 줄었고, 행여 오해를 살지 몰라 비싼 식당에는 아예 발길을 끊는 분위기다.
정부서울청사에서 근무하는 한 공무원은 "1년 전만 해도 일주일에 몇 차례씩 업계에서 저녁을 먹자고 제의했는데, 법 시행 이후 그런 제안이 뚝 끊겼다"며 "어쩌다 저녁을 먹어도 김치찌개에 소주 한 잔 곁들이는 정도"라고 말했다.
청사 주변 일식당이나 한식당 등 고급식당들은 문을 닫거나 리모델링을 거쳐 3만 원 이하 메뉴를 파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모임을 해도 인근 전통시장 등 상대적으로 저렴한 식당을 찾는 일이 일상화했다.
세종청사에서 근무하는 한 공무원은 "전과 달리 비싼 식당에는 아예 가지 않고, 저녁을 먹더라도 간단히 1차만 하고 헤어지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전했다.
세종청사 인근 한 식당은 청탁금지법 규정에 맞춰 가격을 3만 원에 맞추되 '조용한 대화'를 좋아하는 공무원의 특성을 고려해 독립된 방을 여러 개 만드는 쪽으로 리모델링했다. 이 식당은 당일 예약이 불가능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책잡힐 만한 상황 자체를 피하는 분위기도 커졌다. 서울 시내 한 자치구 관계자는 "일선 공무원이 점심시간을 전후해서는 민원인과 만남이나 회의를 가급적 피하려 하고 있다"며 "식사 자리는 아예 삼가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조직 내부 '악습'도 사라졌다. 상사와 부하 직원이 저녁을 먹을 때 일부 자리에서는 부하 직원이 밥값을 내는 관행이 있었으나, 이런 문화가 사실상 없어졌다고 여러 공무원은 전했다. 회식 등 직장 술자리 자체가 눈에 띄게 감소해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게 됐다는 경우도 많다.
관가의 이런 풍토 변화는 공무원들을 상대해야 하는 금융권 등 업계 분위기도 바꾸고 있다.
대관업무를 주로 맡아 온 한 금융회사 관계자는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주말 골프 약속이나 평일 술자리가 줄어 입사 이후 처음으로 취미활동이나 종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면서 "이는 놀라운 경험"이라고 말했다.
공직자는 아니지만, 청탁금지법 적용 대상인 언론사 기자들 역시 공무원과 식사 자리가 줄었다. 저녁 시간을 자녀와 보내거나 평소 하고 싶던 공부를 하며 자기계발을 시작하며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기는 이들도 있다.
한 방송사 기자 A(35·여)씨는 "전에는 저녁 약속과 야근이 이어져 일주일 내내 친정에 아이를 맡기는 주가 많았는데 청탁금지법 덕분에 그런 주가 없어졌다"며 "법 시행 전과 비교해 약속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 같다"고 말했다.
◇ 아이들도 "김영란법에 걸린다" 농담…교육현장도 법 정착
교사에 대한 청탁이나 금품·향응 제공이 '촌지'라는 말로 대표되던 일선 학교에서는 청탁금지법이 무난히 정착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정(情)이 없어질 만큼 '지나치게 잘 정착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 김모(30) 씨는 "자녀가 학급회장이 되면 반 친구들에게 '한턱 쏘는' 일도 없다"면서 "체육대회나 체험학습 때도 담임교사 식사를 따로 챙기지 않아도 돼 교사와 학부모 서로 부담이 없어졌다"고 전했다.
김씨는 "예전 생각에 학교로 햄버거 등을 보내는 학부모도 있지만, 담임교사는 먹지 않고 학생들만 먹도록 지도한다"면서 "학생이 선생님에게 초콜릿 한 조각을 주면 주변 아이들이 '너 김영란법 걸린다'고 농담할 정도"라고 말했다.
불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학부모들이 이용하는 온라인 '맘 카페' 등에는 "정말 고마운 선생님이 있는데 청탁금지법에 걸리지 않고 간식이나 작은 선물을 드릴 방법이 없느냐"고 묻는 글이 종종 올라온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 위원도 청탁금지법 적용 대상이어서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학폭위원을 맡지 않으려는 분위기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20여년간 교직 생활한 교사 이모(58)씨는 "스승의 날이나 명절 등에 '받지 않고 주지 않는' 문화가 자리 잡는 것은 좋지만, 기존 관습이나 문화를 생각하면 서운한 것도 사실"이라며 "학급 내에서 음료 하나, 간식 하나를 챙긴다고 해도 법 적용 대상인지 알아봐야 하는 등 주변 눈치를 보게 됐다"고 푸념했다.
대학가에서도 학생이 교수에게 선물하는 모습이 사실상 사라졌다. 학생과 교수들은 "청탁금지법이 머리에 입력된 후로 교수들이 일절 선물을 받지 않으려고 조심하다 보니 학생들도 이제는 자연스레 준비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의 한 대학 교수는 "좋은 세미나가 있길래 열심히 하는 학생 한 명을 데리고 갔더니 며칠 뒤에 카카오톡으로 음료 기프티콘을 선물하더라"면서 "법에 저촉될까 봐 '선물 거절' 버튼을 누르고 마음만 받았다"고 말했다.
법 시행 이후 대학생이 교수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법으로는 '이메일 보내기'가 주를 이루는 분위기다.
대학생 조모(25)씨는 "여러 교수님이 '음료수 선물도 조심해 달라'고 신신당부하셨고, 학생들도 괜히 교수님을 곤란하게 만들기 싫으니 학기 끝나고 '수업 너무 좋았다'는 이메일을 보내는 정도로 표현하게 됐다"고 전했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는 "음료수 한 병보다 인사 한 번이나 질문 한 번이 더 고맙다"면서 "청탁금지법 때문에 사제 관계가 서먹해진다는 우려는 전혀 현실이 아니다"라며 법 시행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했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한 학생들이 수업에 빠지더라도 학점이나 출석을 인정해주던 관행은 '선심'이 아닌 '제도'로 변화하고 있다. 교수 재량으로 이뤄지던 이같은 관행 역시 청탁금지법상 부정청탁에 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는 올 2학기부터 교육부 지침에 따라 학칙에 출석 인정 요건을 구체적으로 명시했고, 한양대는 취업이 결정된 졸업예정자가 기말시험 전까지 재직증명서 등 증빙자료를 제출하면 최장 8주까지 공결을 인정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온라인 강의나 과제 제출 등 대체 수단을 마련한 대학도 있다.
◇ '란파라치' 실적 전무…"대상자들 몸 사리고 입증도 어려워"
청탁금지법 시행 초기에는 신고포상금을 받고자 법 위반 사례를 찾아다니는 '란파라치'가 많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최근까지 청탁금지법 신고자에게 포상금이 지급된 사례는 0건이다.
지난해 란파라치 교육 프로그램을 별도로 만든 서울의 한 공익신고 교육 학원은 수강생으로 북적거리던 법 시행 초반과 달리 조용한 모습이었다.
학원 관계자는 "란파라치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청탁금지법 적용 대상자들이 몸을 사리고 매우 조심한다"면서 "공익신고 요원 입장에서 보면 '사냥감이 없어졌다'고 말할 정도"라고 전했다.
청탁금지법 위반 신고가 예상보다 쉽지 않아 란파라치 활동이 저조했다는 분석도 있다. 제3자 신고는 위법행위가 발생한 시간과 장소, 내용을 기재하고 증거를 제출해야 하는데, 신고자가 위법 사실을 충분히 입증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한 란파라치 학원 관계자는 "신고하려면 법 위반행위가 확실하고 증거물을 제출해야 하는데 당사자들이 서로 입을 맞추면 그만"이라며 "한 건 입증하려면 경비만 나가고 '생고생'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임창오 한국신고포상양성협회 회장은 "란파라치는 처음부터 없었다"며 "청탁금지법을 피할 각종 '꼼수'가 등장하고, 이를 밝힐 증거는 찾기 어려울 게 분명했는데 '돈이 된다'는 부분만 강조돼 엉터리 교육이 난무했다"고 지적했다.
법 시행 이후 1년이 지나는 동안 경각심이 무뎌져 법 저촉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도 있다는 공직사회와 언론계 등의 평가도 있다. 한 공무원은 "처음에는 밥값을 각자 냈지만, 요즘은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며 "청사 주변 일부 식당에서는 다시 비싼 메뉴가 생겼다"고 말했다.
한편 대검찰청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9월 28일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올해 8월까지 111명(동일인 중복 합산)이 수사를 받았고 이 가운데 7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에 회부된 7명 중 구속기소가 3명, 불구속 기소 2명, 벌금형 약식기소 2명이었다.
1심 판결이 선고된 인원은 현재까지 2명이다. 지난 7월 평창동계올림픽에 대비한 도로개량 사업을 맡아 도로포장 업체로부터 현금 200만원을 받은 한국도로공사 전 직원이 벌금 500만원의 처벌을 받았다. 전체 피의자 중 71명은 현재 수사를 받고 있고, 25명은 혐의없음(3명), 각하(22명) 등으로 불기소 처분됐다. 보호사건으로 법원에 이송되는 등 기타 경우는 8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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