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한 투표로 역풍 직면, 국제여론도 외면
(서울=연합뉴스) 유영준 기자 =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KRG)가 주민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분리 독립을 추진하고 있으나 앞길이 험난하다.
1차 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식민국들의 일방적인 국경획정으로 수천만 민족이 이라크와 이란, 시리아, 터키 등지로 뿔뿔이 헤어지게 된 쿠르드족의 숙원인 독립국 수립은 타당한 명분과 나름의 국제사회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시기적으로 성급했다는 중평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9일 평가했다.
쿠르드족 내에서는 지난 2006년 별 마찰 없이 세르비아에서 분리한 몬테네그로를 분리 독립 모델로 삼아온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상황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세르비아로부터 물리적 마찰을 통해 분리한 후 아직 유엔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코소보를 닮아갈 소지가 다분하다.
더구나 코소보의 분리에는 미국 등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세르비아를 공습함으로써 지원했지만, 이번에는 미국도 쿠르드의 분리 독립에 반대하고 있어 상황이 훨씬 나쁘다.
KRG는 우선 자신들이 속한 이라크로부터 분리 독립을 인정받는 것이 급선무이나 연방정부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고 있다. KRG로서는 먼저 이라크 정부로부터 분리를 인정받은 후 국제사회로부터 독립을 인정을 받아야 하는 2단계 절차를 거쳐야 하는 상황이다.
지난 20년간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비교적 성공적인 분리 독립 사례는 동티모르와 몬테네그로, 남수단 등 3곳에 불과하다. 이들은 모두 이전에 자신들이 속한 나라들로부터 승인을 받은 후 독립을 이뤄냈다.
남수단은 독립 과정에서 최악의 내전을 겪으면서 주민의 3분의 1이 이탈하는 등 초토화했다.
미국과 서방의 지원으로 분리에 성공한 코소보는 동족인 인접 알바니아 등지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나 러시아의 반대로 아직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또 자국 내 분리주의 움직임을 경계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 스페인 등으로부터도 아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KRG는 그동안 국제사회의 공적인 이슬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 소탕전에 앞장서면서 동맹들로부터 미래 독립 구상에 암묵적인 공감을 받아왔다.
그러나 IS와의 전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난 25일 단행된 분리독립투표는 역풍을 불러왔다. 미래 독립에 대한 우호적인 국제여론이 반전하면서 KRG가 독립을 이루는 데 도움이 긴요한 주요국들도 등을 돌렸다.
그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해온 이라크 연방정부와의 관계도 일순간에 악화했으며 인접국들은 물론 미국도 분리 독립 움직임을 비난하고 나섰다. 우호적인 여론에서 일순 사면초가에 몰린 셈이다.
이라크 중앙정부 내 적대적인 세력들도 반쿠르드 전선에 결집하는 한편 직전까지 주요 우군이었던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도 적대적으로 돌아섰다.
바그다드에 있는 싱크탱크 바얀 연구소의 사자드 지야드 소장은 WSJ에 "강경 아랍세력을 포함해 누구도 쿠르드의 독립국 수립 염원을 부인하지 않아 왔으나 그 시기와 국경획정 및 기타 문제들이 먼저 해결됐어야 했다"면서 그러나 KRG의 일방적인 주민투표 강행이 '모두를 불편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미 국무부도 주민투표에 깊은 실망감을 표명하면서 쿠르드 지역의 불안과 주민들의 곤경을 가중할 뿐이라고 경고했다.
서방 등 외부에서 주민투표를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시기가 순수한 전략적 고려보다 KRG 내부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됐다는 판단 때문이다.
마수드 바르자니 KRG 수반은 내부 다른 정치 세력들로부터 도전을 받는 상황에서 주민투표 실시를 통해 민족주의 감정을 조장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정치적 인기몰이에 성공했다.
국제위기그룹(ICG)의 이라크 전문가 마리아 판타피에는 "주민투표가 정치인들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수준의 민족적 열기를 불러일으켰다"면서 "쿠르드 주민들은 투표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나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재충전하는 호기로 활용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투표의 역풍은 현실로 벌써 다가오고 있다. 그동안 KRG는 중앙정부로부터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받아 국경관리와 국제공항 운용 및 비자 및 입국 정책 등을 자체적으로 시행해왔으나 투표 이후 중앙정부는 국경 및 국제공항 관리를 연방정부 관할로 이관한다고 공표했다.
KRG가 중앙정부의 정책 변경을 그대로 따를지는 불분명하나 일단 이집트와 이란, 레바논 등 인접국들이 이라크 중앙정부의 결정을 무시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KRG가 숙원인 독립을 야심 차게 내걸었으나 성급한 결단으로 오히려 독립에 부정적인 정세를 조성한 감이 없지 않다.
그들은 물리적 충돌을 빚은 코소보보다 몬테네그로 방식을 모델로 삼는다는 입장이나 지금 상황은 오히려 코소보 모델이 '양반'일 정도라고 WSJ은 지적했다.
yj378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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