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중국을 방문한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북한과 복수의 대화채널을 열어 놓고 대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고 밝혀 주목된다. 틸러슨 장관은 지난달 30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면담 후 기자들에게 "북한과 두세 개의 대화채널을 열어두고 있다"면서 "(북한의 대화 의지를) 살펴보고 있으니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그는 "자체 채널을 갖고 있다"면서 "우리는 그들과 대화할 수 있다"고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정부 고위인사가 북한과 채널이 열려 있다고 말한 것은 처음이다.
틸러슨의 이 발언은 여러모로 관심을 끌 만하다. 지난달 북한의 6차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도발에 '북한 완전파괴'를 경고한 트럼프 대통령의 유엔 연설이 나왔고, 이어 상대방 지도자를 정조준한 '말 폭탄'이 북미 간에 오갔다. 또 미군 전략폭격기의 동해 NLL(북방한계선) 이북 기습비행에 북한이 '선전포고'라고 맞서면서 군사적 충돌 우려가 고조됐다. 틸러슨 발언은 이처럼 첨예한 북미 간 대치상황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낳고 있다. 다소 성급하지만 11월로 예정된 트럼프 대통령의 한·중·일 등 아시아 5개국 순방이 한반도 정세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없지 않다.
청와대는 기자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를 통해 원론적인 반응을 보였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정부는 대화를 통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강조해왔고, 대화는 미북·남북 등 양자 대화와 다자대화를 포함해 여러 형식이 병행되어 추진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미 양국 정부는 북한을 대화로 끌어내기 위해 최대한 제재·압박이 필요하다는 원칙을 견지하면서, 대북 접촉채널 유지 노력에 관해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북미 간 대화채널을 가동하고 있다는 틸러슨의 발언이 우리 정부의 기본 입장에 부합하고 놀랄 만한 일도 아니라는 뜻 같다. 하지만 박 대변인의 발언만 봐서는 우리 정부가 북미 간 대화채널에 대해 미정부로부터 미리 통보받았는지 확실하지 않다. 이 대화채널이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우리 정부가 안보위기 상황에서도 대북 대화를 중요시 하는 입장을 보이자 이를 불만스럽게 보는 기류가 미정부 내에 있다고 한다. 미국이 북한과 물밑 대화를 시도하면서 우리 정부와 충실히 협의해왔다면 왜 미정부 안에 이런 분위기가 생기는 건지 의문이다.
이번에도 문제는 북한의 태도다. 지금까지 북한은 미국의 대화 타진에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헤더 노어트 미 국무부 대변인은 성명에서 "북한 현 정권 붕괴 촉진, 체제변화 추구, 한반도 통일 가속화, 비무장 지대 이북 군사력 동원에 관심이 없다는 미국의 확언에도 북한 관리들은 비핵화 대화에 관심이 있다거나 준비돼 있다는 어떤 신호도 보여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성명에서 '미국의 확언'으로 열거된 내용은, 북한이 입버릇처럼 미국에 요구해온 '적대시 정책' 포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북한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다른 계산이 있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목전에 다가온 듯 보이는 '핵보유국' 지위일 것이다.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재진입과 핵 소형화 기술을 더 고도화해서 스스로 핵보유국임을 선언한 다음 미국과의 대화에 응할 속셈일 수 있다. 바로 이 부분이 북미 대화를 가로막는 최대 난관이다. 미국이 절대로 용인할 수 없는 길을 북한은 기어코 가려고 하는 것이다.
틸러슨 장관은 미정부 내에서 온건파로 통한다. 하지만 중국을 방문해 시 주석을 만나고 나서 바로 한 '북한과 대화 타진' 발언이 혼자 생각은 아닐 것이다. 미정부도 북한과의 긴장이 너무 높아졌다고 보고 단기적 출구 전략을 모색하려는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 '10월 위기설'에 휘말린 한반도 정세의 안정을 위해 반가운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 노동당 창건일(10일)과 중국 당 대회(18일)를 앞두고 북한의 추가 도발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북한이 이번에 다시 국제사회의 우려를 현실로 만든다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는 결과를 맞을지 모른다. 어렵게 조성되고 있는 미국과의 대화 기회를 북한 스스로 차버리지 말기 바란다.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