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적 염원에 아전인수식 기대했다가 좌절하기 10여년
이승우·한강 등 유럽서 조명…'고은 이후' 비관론도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한국 시인 고은(84)과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68)는 올 가을에도 어김없이 국가대표로 불려 나왔다. 언론과 유럽 현지 도박사들 손에 이끌려서다.
고은은 2002년, 하루키는 노벨문학상에 앞서 받는다는 카프카상을 수상한 2006년부터다. 올해는 2014년 카프카상을 받은 중국 작가 옌롄커(閻連科)가 유력하다는 루머가 유럽 현지에서 돌면서 '노벨문학상 삼국지'가 펼쳐졌다.
정작 이들이 최종후보 5명 안에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스웨덴 한림원이 극구 부인하는 지역·언어·장르별 안배와 정치적 요인이 추측의 근거다. 올해의 경우 아시아·아프리카 작가가 받을 차례라거나 지난해 촛불혁명의 영향으로 고은의 수상이 유력하다는 아전인수식 해석이 나왔다.
◇ 고은과 하루키는 어떻게 '국가대표'가 됐나
고은은 노벨문학상과 관련한 질문에 답하지 않은 지 오래됐다. 하루키는 재작년 팬들과 온라인 문답을 통해 "솔직히 얘기해서 정말 피곤합니다"라고 토로했다. 낯뜨거운 희극이 연례행사처럼 계속되면서 지켜보는 이들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제 고은 시인을 그만 놓아 달라"는 말이 몇 년 전부터 나온다.
그러나 고도의 경제성장으로 높아진 국격에 걸맞게 노벨문학상 작가 한 명쯤은 가져야 한다는 게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학계 안팎의 암묵적 숙원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와 오에 겐자부로(1994년) 등 이미 두 명의 수상자를 낸 일본 문학에 대한 열등감과 경쟁심리도 작용했다.
박경리·김지하·이문열·황석영 등이 잠재적 후보로 꼽혔고, 정부 차원에서 번역을 활성화하며 한국문학을 세계무대에 소개하려 애썼다. 그러는 와중에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외신에 언급된 고은이 사실상 단일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몇 년 전에는 한 문인단체가 노벨상 염원의 뜻을 담아 '노벨문학상 빈자리 좌대'를 세우는 일도 벌어졌다.
반면 하루키는 오로지 이야기의 힘으로 전 세계 독자를 사로잡으며 자연스레 노벨상에 근접한 경우다. 하루키는 1976년 무라카미 류에 밀려 대형 신인 등용문인 아쿠타가와상에서 탈락했고, 오에 겐자부로와 가라타니 고진 등 유력 문인들의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미국소설을 번역한 듯한 문체에,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 같은 거대하고 이상적인 주제의식이 결여됐다는 이유였다. 노벨문학상과 거리가 먼 작가라는 지적도 같은 이유로 나왔다. 하루키 소설에서 노벨이 유언으로 제시한 '이상적인 방향'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출세작인 '노르웨이의 숲'이 전 세계에서 1천만 부 이상 팔린 이래 내놓는 작품마다 '하루키스트'를 양산하며 카프카상과 예루살렘상 등 유수의 국제문학상을 휩쓸었다. 비판적이었던 일본 평단은 하루키의 전 세계적 인기에 사실상 무릎을 꿇은 모양새다.
유럽의 한 베팅정보업체 집계에 따르면 지난 5일 수상자 발표 전까지 하루키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돈을 건 사람이 전체의 절반가량이었다. 수상 확률이 가장 높다고 예측된 응구기 와 티옹오보다 3배 이상 많았다. 전 세계 작가들을 압도하는 폭넓은 인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 주목 받는 '고은 이후' 차세대 작가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국회의원 시절인 지난해 문학진흥법을 발의하면서 "노벨문학상을 말할 때 언제까지 고은 시인만을 언급할 건가"라고 물었다. 한국문학을 세계무대에 적극 알리되, 올림픽 준비하듯 눈앞의 노벨문학상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20∼30년 뒤를 내다보고 젊은 작가군을 키워야 한다는 얘기다.
다행히 최근에는 후배 작가 여럿이 국제무대에서 주목받고 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한강(47)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데 이어 이달 초에는 '소년이 온다'로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수상했다. 2011년작 '희랍어 시간'은 다음달 수상작이 발표되는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 후보에 올라 있다. 맨부커상 수상을 기폭제로 한강의 문학세계 전반이 조명받는 분위기다.
소설가 이승우(58)는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유럽 출판·문학계의 허브 역할을 하는 프랑스 문학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식물들의 사생활'과 '그곳이 어디든'이 권위 있는 문학출판사 갈리마르의 세계명작 총서 '폴리오' 시리즈로 소개됐다. '생의 이면'은 프랑스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페미나 외국문학상 최종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는 이승우를 노벨상 가능성이 큰 작가로 꼽으며 "유럽적 정신세계를 가졌다"고 평했다. 이승우의 소설은 지역·민족적 차별성이나 서구의 이국 취향에 기대는 대신 형이상학적 사유를 토대로 한 보편적 감성으로 유럽 독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 한국·일본 모두 앞으로 더 어렵다?
칠순을 앞둔 하루키의 노벨상 수상에는 이제 비관론이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일본계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에 일본인들이 제 나라 작가처럼 흥분하지만, 그만큼 하루키의 수상은 당분간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유럽 독자들은 오히려 일본어와 독일어를 함께 쓰는 이민작가 다와다 요코(57) 등 차세대 작가군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고은·황석영·최인훈 등 한국문학의 황금기를 이룬 1930∼1940년대생 작가들의 시대가 지나면 노벨문학상은 더 멀어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남북분단·이념대립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로 보편적 공감을 얻고, 반독재·민주화 투쟁 경력을 부수적으로 더한 게 그나마 지금까지 유럽 현지에서 통할 만한 전략이었다. 이런 강점을 갖추지 못한 뒷세대는 세계문학과 격차가 더 크다는 냉정한 평가다.
방민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박완서와 김지하, 최인훈 등은 시대적 특성을 안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후배 작가들은 후일담을 쓰거나 미학적 형식주의에 빠진 경우가 많고 깊이 들어가는 데 실패했다"며 "세계시장에서 책이 좀 팔린다고 수상 자격이 있는 것처럼 호들갑 떠는 건 노벨문학상을 만만하게 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방 교수는 "노벨문학상은 최근 세계문학의 전위가 된 반면 한국문학은 여전히 통념에 젖어 있다. 상을 주고 각광을 하면서도 작가에게 의미있는 시도를 할 시간적 여유를 안 주고 있다"며 "노벨상을 받을 만한 작가가 여럿 나올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 문학출판사와 문학단체 같은 그룹들이 어떻게 한국문학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성찰해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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