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한동안 잠잠했던 미국의 통상압박이 다시 거세지고 있다. 한미 양국은 지난 4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회의를 하고 FTA 개정협상에 착수하기로 사실상 합의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지난 8월 서울에서 양국 공동위원회 회의를 한 지 한 달 반 만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한미FTA 폐기'까지 언급하고,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로 한반도 안보위기가 고조된 상황에서 미국 측 요구를 수용한 모양새가 됐다. 우리 정부로서는 최대 동맹국인 미국의 이런 움직임이 달갑지 않겠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가 워낙 강해 선택의 여지도 없었을 것 같다.
일단 정부는 관련 법에 정해진 대로 경제적 타당성 평가·공청회·국회보고 등 필요한 절차를 밟아간다는 방침이다. 미 행정부도 무역촉진권한법(TFA)에 따라 개정협상 개시 90일 전까지 관련 내용을 의회에 보고해야 한다. 양국이 각자 국내 절차를 서두르면 내년 초쯤 협상이 시작될 수 있다고 한다. 미국 측은 자국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해온 자동차·철강·농업 등 부문에서 공세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국은 한미FTA의 호혜성을 강조하면서 서비스 부문과 투자자-국가소송제((SD) 등에서 불리한 조항을 고치는 데 주력할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한미 공동위 2차 회의 다음 날인 지난 5일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수출하는 세탁기로 인해 국내 산업이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다"는 판정을 내렸다. 지난달 22일 한국산 태양광 패널에 이은 두 번째 산업피해 판정으로, 미국 정부가 한국산 상품에 대해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발동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세이프가드가 실행되면 연간 1조 원을 웃도는 삼성전자와 LG전자의 대미 세탁기 수출에 큰 타격이 불가피하다. 이 밖에 한국산 철강과 석유화학 제품에 대한 미정부의 반덤핑 판정도 잇따르고 있다
미국의 이런 파상공세는 트럼프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 공약과 맞닿아 있다고 봐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지기반인 '러스트 벨트'(쇠락한 공업지대)의 제조업 부활 등을 위해 보호무역주의를 강력히 밀어붙이고 있다. 트럼프는 한미FTA 개정과 관련해 최근 자국 협상팀에 "'미치광이 전략'을 구사해 한국의 양보를 받아내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안보위기에 처한 동맹국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챙기겠다는 것이니 우리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한미FTA 개정은 없다'고 단언했던 우리 정부의 판단이 안이했다는 생각도 든다. 야당이 정부·여당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데 그럴 만하다. 하지만 이제 한미FTA 개정은 되돌릴 수 없게 됐다. 정부와 정치권, 산업계가 힘과 지혜를 모아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최선이다. 한미FTA가 그동안 양국 모두에 이익이 됐고, 협정 개정이 부당하다는 여론이 미국 내에도 있다고 한다. 우리한테 불리했던 조항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어차피 협상은 주고받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받으려면 내어줄 각오도 해야 한다. 당당하고 합리적인 자세로 한미FTA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기회로 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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