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개업하지 않고 교수로 음지서 영리 활동…'부적절' 지적
박주민 "작성자 공개·신고제도 운영 등 대책 필요"
(서울=연합뉴스) 서혜림 기자 = 퇴임 후 변호사로 개업하지 않아 칭송받던 대법관 출신 대학교수가 개인정보 유출 소송에서 금융회사의 편을 드는 장문의 의견서를 본인 명의로 작성해 법원에 제출한 사실이 확인됐다.
대법관 출신이 이미 확정판결이 선고된 소송과 관련해 학술 논문을 쓰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한참 진행 중인 소송과 관련해 금전적 이득을 취하고 법원에 의견을 내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관예우 근절 대책의 하나로 퇴임한 고위 법관들에게 변호사 개업 대신 공익 활동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확산되는 가운데 나온 이 같은 사례는 감시와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또 다른 '꼼수 전관예우'를 낳을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1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법원과 변호사 업계 등에서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대법관을 지낸 A 교수는 지난해 1월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44쪽 분량의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이 소송은 다수 소비자들이 자신의 개인정보가 유출돼 손해를 입었다며 한 금융회사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한 사건으로, A 교수는 의견서를 통해 소비자들의 반대편에 섰다.
A 교수는 '개인정보 유출로 인한 위자료 배상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의견서에서 "이 사건의 경우 성명, 전화번호 등이 주로 유출됐고, 정보 주체의 사생활을 현저히 침해할 우려가 있는 개인정보는 유출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전화번호가 유출돼 텔레마케팅에 사용되는 등으로 인해 개인들이 받는 귀찮음과 불편함이 법적으로 배상이 돼야 할 현실적인 손해라고 평가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적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손해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기계적으로 손해액을 산정할 경우 기업의 존립에 영향을 미쳐 궁극적으로 고객에 대한 서비스 저하를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A 교수는 법조계 안팎에서 탁월한 실력으로 정평이 난 법조인으로, 피고 측 대리인은 금융회사 승소를 위해 특별히 A 교수를 섭외해 의견서 작성을 부탁한 것으로 전해졌다.
통상 변호사가 소송 중 대학 교수 등에게 의견서를 의뢰할 때는 당사자 일방의 입장을 담은 상세한 자료를 제공한다. 사실상 미리 완성한 의견서에 명의만 빌리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아울러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개별 사건을 수임하면 '도장 값'으로만 3천만 원 이상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관 출신이 아니더라도 재조 출신 법조인이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은 채 의견서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소송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대법원 재판연구관과 부장판사를 지낸 뒤 퇴직해 유력 연구단체의 회장을 오래 맡은 B 교수가 앞서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키코(KIKO) 사건에서 대형 로펌의 의뢰를 받아 금융회사를 위한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한 것도 대표적인 사례다.
B 교수는 19쪽 분량의 의견서에서 키코와 비슷한 금융사고에서 금융회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독일연방대법원의 판례가 국내 키코 사건에는 적용될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런 의견서는 사건 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재판부와 소송 당사자만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외부로 공개되지 않고 대법원이 집계하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만에 하나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은 고위 법관 출신이 의견서를 통해 개별 소송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더라도 공적으로 감시하고 규제할 시스템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셈이다.
박 의원은 "대법관 같은 고위 법관 출신의 의견서는 재판부에 상당한 부담을 줄 가능성이 있다"며 "그가 이를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면, 금액과 상관없이 매우 부적절한 처신"이라고 지적했다.
박 의원은 특히 "일각에서 '꼼수 전관예우'가 횡행해도 변호사 단체 등이 규제할 방법이 없다"며 "대법원이 의견서 작성자를 공개하든지 신고제도를 운영하든지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hanj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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