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링지화·1992년 샤오양·1987년 덩리췬 등 수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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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연합뉴스) 안승섭 특파원 = 오는 18일 개막하는 제1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 대회)가 지도부의 결정을 추인하는 '거수기'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14일 보도했다.
19차 당 대회에는 31개 성·직할시·자치구와 대만동포친목회, 홍콩·마카오 특별행정구역, 인민해방군, 무장경찰, 당 중앙조직, 국가기관, 기업·금융계 등을 대표해 2천287명의 당 대표가 참가한다.
당 대회는 최고 지도부인 7명의 상무위원을 중심으로 결정한 중앙위원과 중앙후보위원을 추인하는 역할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여기에는 민의(民意)가 반영될 가능성이 있다고 SCMP는 분석했다.
바로 당의 최고 대표기관인 200여 명의 중앙위원과 170여 명의 중앙후보위원을 결정하는 선거가 후보자가 당선자보다 많은 '차액(差額)선거' 방식으로 치러지기 때문이다.
후보자가 당선자보다 많으므로 최소 득표순으로 탈락해 최종 당선자를 결정하며, 여기에 민의가 반영될 여지가 있다.
2012년 제18차 당 대회 때는 아들의 교통사고로 오명을 얻은 링지화(令計劃)가 수모를 겪어야 했다.
같은 해 3월 링지화의 아들 링구(令谷)는 밤새 술을 마시고 매춘부를 고급 외제 차 페라리에 태운 채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로 숨졌다. 이로 인해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의 측근이었던 링지화는 좌천까지 당해야 했다.
이에 대한 당 대표들의 경멸을 반영하듯 당시 투표에서 링지화는 205명의 중앙위원 중 가장 적은 표를 얻어 간신히 입성했다.
당시 당 대회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링지화가 최소 득표를 했다는 발표가 나왔을 때 큰 소란이 있었다"며 "그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링지화는 거액의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조사를 받고 지난해 7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87년 13차 당 대회 때는 당 중앙선전부장으로서 지도부에 의해 25명의 정치국원으로 내정까지 됐던 덩리췬(鄧力群)이 중앙위원 선거에서 탈락했다.
덩리췬은 강경 보수파로서 1980년대 내내 진보 성향의 지식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한 반감이 선거에서 표출됐다는 얘기다.
1992년 14차 당 대회 때는 충칭(重慶)시 서기로서 정치국원 후보 명단에도 올랐던 샤오양이 선거에서 탈락해 중앙위원 진입에 실패했다고 SCMP는 전했다.
ss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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