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연합뉴스) 황철환 특파원 = 김정남 암살 계획을 사전에 알았던 듯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는 와중에도 동남아 출신 여성 피고들이 무죄 주장을 굽히지 않아 눈길을 끈다.
20일 현지 언론과 외신에 따르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동남아 여성들의 변호인단은 전날 기자들을 만나 지금껏 제시된 증거만으로는 유죄 입증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말레이시아 검찰은 이달 2일 샤알람 고등법원에서 시작된 공판에서 김정남이 살해된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제2터미널내 CCTV 영상을 증거물로 제출했다.
올해 2월 13일 오전 사건 당시 촬영된 이 영상은 피고들이 김정남의 얼굴에 화학무기인 VX신경작용제를 바른 뒤 신속히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공항을 떠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증인으로 출석한 현지 경찰 당국자 완 아지룰 니잠 체 완 아지즈는 도안 티 흐엉이 이틀 전 예행연습 당시와 달리 "훨씬 거칠고 공격적"이었으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다가 손을 씻고 난 뒤에야 태도가 안정됐다고 진술했다.
시티 아이샤는 공격 직전 북한 외무성 소속 요원으로 알려진 홍송학(34)으로 추정되는 남성으로부터 공항을 떠나기 위한 선불식 택시 티켓을 받기도 했다.
이는 피고들이 범행 계획을 상당 부분 알았다는 검찰의 기소 내용을 뒷받침하는 정황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변호인단은 피고들이 몰래카메라를 찍는다는 북한인 용의자의 거짓말에 속았을 뿐이란 입장을 고수했다.
인도네시아인 피고 시티 아이샤(25)의 변호를 맡은 구이 순 셍(61) 변호사는 "지금까지 제시된 증거는 모두 정황증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함께 기소된 베트남 국적자 도안 티 흐엉(29)의 담당 변호사인 살림 바시르(47)는 "우리는 의뢰인이 희생자의 얼굴에 VX를 발랐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손에 올려진 물질이 VX란 것과, 자신도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여부"라고 말했다.
그는 말레이시아 화학청 산하 화학무기분석센터의 라자 수브라마니암 소장이 외견상 특징만으로는 VX가 독극물이란 사실을 알 수 없으며, 기름 같은 물질을 사용했다면 누구든 신속히 손을 씻을 것이라고 법정에서 증언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범행 직후 출국해 도주한 북한인 용의자들과 달리 시티 아이샤와 도안 티 흐엉이 쿠알라룸푸르 인근에 머무르다가 잇따라 검거된 것 역시 유리한 정황으로 꼽힌다.
도안 티 흐엉은 김정남 암살 이틀 뒤 범행현장인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제2터미널로 돌아와 베트남행 여객기를 타려다 붙잡혔다. 시티 아이샤는 같은달 16일 쿠알라룸푸르 외곽의 한 호텔에서 체포됐다.
변호인들은 "무슨 행동을 했든 간에 이들은 어떤 결과가 뒤따를지 몰랐다"면서 "이들은 살해 의도가 없었고 그것이 독극물인지도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말레이시아 현지법은 고의로 살인을 저지를 경우 사형을 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유죄가 인정될 경우 시티 아이샤와 도안 티 흐엉은 교수형에 처할 수 있다.
샤알람 고등법원은 오는 24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현장검증을 실시한 뒤김정남 암살 사건에 대한 9일차 공판을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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