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치우, 오래된 역사병'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치우는 마구잡이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살해하고, 오만하고, 사악하고, 난을 일으켰으며, 빼앗고 도둑질을 하여 혼란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중국의 요순시대부터 주나라 시기까지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상서'(尙書)의 일부인 주서(周書) 여형(呂形) 편에는 치우(蚩尤)라는 인물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재앙을 뜻하는 '치'(蚩)와 욕심을 의미하는 '우'(尤)가 결합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치우는 한족(漢族)에 대항한 악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수천 년 전에 존재했다는 전설 속 인물인 치우가 현대에 갑작스럽게 환생했다. 중국뿐만 아니라 옆 나라인 한국에서도 치우가 민족의 조상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심지어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을 응원한 '붉은 악마'의 마스코트가 치우를 형상화해 만들어졌다는 말도 나왔다.
중국에서 언어인류학을 공부한 김인희 박사가 쓴 신간 '치우, 오래된 역사병'은 상식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치우 환생의 과정을 조명하고, 치우의 실체를 파헤친 책이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과 한국에서 치우를 선조로 모시는 견해가 회자하기 시작한 시기는 모두 1990년대다.
그는 일단 중국에서는 1989년 발생한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계기로 정부가 지향하는 민족주의의 형태가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1980년대까지는 민족의 해방이 목적이었다면, 1990년대 이후에는 중화주의에 치우쳐 '천하주의적 민족주의'를 표방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들은 태곳적 전설의 제왕인 염제(炎帝)와 황제(黃帝)를 시조로 내세웠는데, 소수민족인 먀오족이 치우를 선조로 주장하자
소수민족 통합차원에서 중국 전체의 조상으로 승격시켰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렇다면 한민족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는 치우가 어떻게 한국의 조상으로 등장했을까.
치우는 주류사학계에서 위서로 간주하는 환단고기에 '치우천왕'(蚩尤天王)이라는 명칭으로 나온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이 문헌과 귀면와(鬼面瓦)를 근거로 한국의 민족적 뿌리가 치우이고, 고대에 치우가 중국 중원에서 벌인 싸움은 한민족의 영토가 그만큼 넓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저자는 한국과 중국에서 공히 치우는 민족주의에 이용됐다고 지적한다. 마음대로 쓰는 역사인 '심사'(心史)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집단기억의 강화와 구조적 망각으로 역사를 만드는 이러한 현상을 '역사병'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치우는 케케묵은 신화 전설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21세기 역사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다"며 양국이 모두 '역사과잉'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한다.
푸른역사. 368쪽. 2만원.
psh59@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