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선시대 이규보·이제현·박지원 등 7인의 짧은 글 엮어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이 땅에서 수백 년 전 앞서 살다간 문인들의 마음속 고뇌와 깨달음, 삶에 대한 성찰을 엿볼 수 있는 책이 나왔다.
국문학자이자 시인인 김영석 배재대 명예교수가 엮은 '한 번은 읽어야 할 우리 고전 명수필'(문학의숲)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옛사람들의 생각을 한 권의 책으로 쉽게 만나볼 수 있게 한다.
기존에 우리가 접한 동양 고전은 공자나 맹자 등 중국 성현들의 철학서를 풀이해놓은 책들이 대부분이고, 우리나라의 고전을 쉽게 풀어놓은 책은 많지 않았다. 또 우리 고전의 한글 번역본 역시 어려운 학술서가 주를 이루고, 쉽게 읽히는 수필·산문은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이 책은 특히 일독해볼 만하다.
이 책에는 이규보, 이인로, 최자, 이제현, 권근, 성현, 김만중, 박지원 등 고려·조선 시대에 활약한 문장가 7인의 글이 담겼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서 발췌한 글이 24편으로 가장 많고, 다른 이들의 글도 5∼14편씩 묶였다. 각 글의 분량이 서너 쪽에 불과해 읽는 데 부담이 없다는 점이 큰 미덕이다. 문체도 어려운 고어 투가 아니라 현대적으로 다듬어져 읽기 편하다.
이 책으로 우리 고전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무려 800여년 전 고려 시대를 살다간 이규보(1168∼1241)의 고민과 깨달음이 지금 우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 우선 놀랄 것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할 수도, 슬퍼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한 가르침이다.
"거울이 맑으면 잘생긴 사람은 기뻐하지만 못생긴 사람은 싫어하네. 그리고 잘생긴 사람은 그 숫자가 적고 못생긴 사람은 그 숫자가 많네. 만일 못생긴 사람이 맑은 거울을 들여다보게 된다면 반드시 그 거울을 깨뜨리고 말 것이네. 그렇게 되면 먼지가 끼어서 흐릿한 것만 같지 못하네. 먼지가 흐릿하게 한 것은 거울의 겉일 뿐이지 그것의 맑음 자체를 해친 것은 아니네." (이규보의 '경설'(鏡說) 중)
적당한 선의 경쟁심은 삶에 활력을 주고 사람을 성장시키는 좋은 채찍이라는 점도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이제현(1287∼1367)의 '역옹패설'에는 우정과 경쟁심에 관한 글인 '김순'과 '조간'의 이야기가 있다.
과거시험에 1등으로 합격한 조간이 늙어 악성 종기로 심하게 앓았는데, 김순이 와서 조간이 죽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울어 조간을 자극한다. 이에 조간은 '내가 만약 죽으면 합격자 중에서 자네가 1등이 되지 않겠느냐'고 응수하고, 그제야 김순은 눈물을 거두고 웃으면서 "이 늙은이가 아직 죽지는 않겠구나"라고 말한다. 이제현은 "우정과 경쟁심은 때로는 실로 종이의 앞면과 뒷면의 차이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썼다.
대머리에 관한 고찰도 눈길을 끈다. 권근(1352∼1409)의 '양촌집'에 실린 '동두설'(童頭說)을 보면 김자정이라는 사람은 호를 '동두'로 짓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만물을 세상에 낼 때, 이빨을 주면 뿔을 주지 않고, 날개를 주면 발 둘만을 주었으니, 사람도 그와 같아서 부귀와 장수를 함께 가진 자는 드문 법이다. 그리고 부귀하고도 능히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내가 많이 보와 왔는데, 내가 어찌 그 부귀를 바라겠는가? 초가집이라도 있으니 내 몸을 가리고, 거친 음식으로라도 주림을 채우니, 천명을 따르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사람들이 이것으로 나를 부르고 나도 이것으로 스스로를 부르는 것은 실로 내가 대머리가 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편역자인 김 교수는 고전을 고리타분하고 오늘날의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편견이고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며 "이 수필집이 독자들에게 우리 고전 수필에 대한 맛보기 역할이라도 충분히 해 줄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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