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가' 성종의 입맛 사로잡은 명품밥
(이천=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드넓은 들녘이 고요하게 텅 비었다.
'아 이제는 한적한 빈 들에 서 보라/ 고향길 눈 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라는 가곡 '고향의 노래'가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들녘의 허허로움은 식탁의 풍요로움으로 변모해 나타난다. 추수철이 지나면 더욱 풍성해지는 진수성찬의 밥상. 그 주역은 역시 쌀밥이다. 국내 대표적 명품쌀의 고장인 경기도 이천에서 그 고슬고슬한 밥맛을 즐겨봤다.
직사각형의 널따란 통나무 밥상. 황금색의 이 소나무 식탁에 눈이 휘둥레질 정도의 진수성찬이 다종다양하게 깔렸다.
돌솥밥, 청국장찌개, 간장게장, 떡갈비, 조기찜, 도토리전병, 돼지보쌈, 연근조림, 잡채, 녹두전, 깻잎장아찌, 조개젓, 호박무침, 콩나물, 메밀야채쌈, 삼색나물 등등등. 헤아려보니 밥과 국, 반찬이 무려 20여 가지에 이른다. 이 식당이 자랑하는 최고의 메뉴 '임금님 정식' 명칭에 걸맞을 만큼 떡 벌어진 상차림! 모든 음식이 고풍스러운 도자기에 담겨 있어 품격을 더한다.
그중 압권은 역시 쌀밥. 검고 둥그런 돌솥은 하얀 쌀밥을 담은 채 새하얀 김을 곡선미 넘치는 춤사위처럼 모락모락 피워 올린다. 밥상 위의 주인공이자 임금님이랄까. 바로 앞에 맛깔스럽게 놓인 간장게장 등 반찬들과 합작해 손님의 목에 침이 절로 꿀꺽 넘어가게 한다. '밥이 차지고 맛있으면 100가지 반찬보다 낫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이 대목에서 내놓은 주방 요리사의 재치 넘치는 한마디! 혹여 서운해할지도 모를 반찬들을 배려해서일까?
"하지만 우리 밥상에는 주(主)도 없고 종(從)도 없어요. 다들 맛있는 음식이죠!(웃음) 하나하나 공을 들여 요리하고 있어서 구색으로 대충 들어가는 음식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밥상에 오방색의 음식을 두루 놓아 손님들이 음양오행의 맛을 맘껏 음미하시도록 하지요. 식탁 위의 조화로운 어울림과 만족감이랄까요?"
◇ '쌀의 고장' 이천
한민족에게 쌀은 식량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민족의 정체성이자 혼이었던 것. 가난과 식민의 시대에는 한과 꿈을 품은 식량 자원이었다. 청동기시대부터 쌀농사를 지었고, 삼국시대 이후 쌀은 주식으로 탄탄히 자리 잡았다.
'쌀'이라는 말과 '밥'이라는 말이 전국 방방곡곡 어디서든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통용된다는 사실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남과 북이 오래도록 분단된 상태이건만 쌀과 밥이라는 말과 정서에선 여전히 같다. '밥'이라고 하면 '쌀밥'을 먼저 떠올릴 만큼 단 한 음절인 '쌀'과 '밥'은 우리 민족의 고귀한 생명이자 끈끈한 공감대다. 식사를 하더라도 '밥을 먹는다'고 한다. 그 정도로 밥이 식단에서 절대적 지위를 차지한다는 얘기다.
경기도 이천은 예부터 대표적인 쌀과 밥의 고장이었다. 벼의 생육에 알맞은 땅과 물, 그리고 기후를 두루 갖추고 있어서다. 토양의 경우 찰흙과 모래가 적절히 섞여 양분 흡수가 잘 되고, 수질 또한 맑고 깨끗한 데다 밥맛을 좋게 하는 마그네슘 성분이 많단다.
분지형 고장인 이천은 특히 결실기인 가을에 일조량이 풍부한 데다 밤과 낮의 기온 차가 커서 벼의 생육 여건으로는 그만이다. '이천(利川)'이라는 지명 자체가 '삶에 이로운 물이 많은 고장'이라는 뜻. 예부터 부자 농부가 많은 풍요의 땅이었음은 당연지사라고 하겠다.
이 같은 지역적 여건에 힘입어 이천쌀은 일찍이 조정의 진상미로 자리를 굳혔다. 옛 문헌에 따르면, 여주의 세종영릉에 성묘하고 환궁하던 성종은 이천에서 밥맛에 깊이 매료됐다. 미식가였던 성종은 입맛과 기운을 돋우는 이천의 '자채쌀'에 흠뻑 빠져 일품의 이천쌀을 수라상에 올리도록 명했다. 자채쌀은 이천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복하천 주변에서 생산되는 극조생 품종. 이 쌀밥 음식이 지금도 수라상처럼 풍성하게 차려져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이천시에는 사음동과 신둔면, 백사면을 중심으로 20여 곳의 쌀밥집이 성업 중이다. 음식 명칭과 종류, 맛 등에서 식당마다 다소 차이가 있으나 자르르 윤기 흐르는 쌀밥맛을 무엇보다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한결같다고 하겠다.
◇ 특산미가 안기는 오감만족의 맛
"쌀밥의 최대 비결은 식재료입니다. 모든 음식이 그렇듯이 쌀밥 역시 기본재료인 쌀이 좋아야 그 맛을 한껏 살릴 수 있지요. 그런 점에서 이천쌀밥은 최고의 쌀로 지은 최고의 음식이랍니다."
신둔면 수광리의 경충대로변에서 쌀밥식당을 운영하는 최향란(62) '임금님 쌀밥집' 대표는 "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아 늘 촉촉하게 젖어 있는 고래실논에서 수확한 특산미가 바로 이천쌀"이라면서 "큰 일교차 덕분에 탄력있게 자라난 이천쌀은 밥을 지을 때 압력밥솥을 굳이 쓸 필요가 없을 만큼 재질이 좋다"고 자랑한다.
궁중음식 연구가인 최 대표에 따르면, 벼는 수확 20일 후에 정미해야 쌀의 탄력과 윤기를 한껏 살릴 수 있다. 쌀을 불리는 시간도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 햅쌀은 아직 건조된 상태가 아니어서 1시간 정도만 불리면 되나 여름에는 2시간여 동안, 겨울에는 4시간가량 물에 불린 다음 잘 씻어서 밥을 지었을 때 최상의 맛을 낼 수 있단다.
"밥은 무쇠솥보다 돌솥으로 지었을 때 따뜻한 온기와 함께 제맛을 내내 유지할 수 있어요. 무쇠솥은 밥이 쉽게 식지만 돌솥은 그 온기를 잘 지켜낼 수 있어서이지요. 토박이 쌀을 사용하되 겉이 검은 서리태를 서너 개씩 올려 밥을 지으면 밥맛도 좋을 뿐 아니라 음양을 상징하는 흑백의 조화미도 즐길 수 있어 일거양득이랍니다."
여섯 살 때부터 방앗간집 딸로 자라면서 쌀과 가까이 지내왔다는 최 대표는 1990년대 초반에 서울로 가 도시락밥집을 운영하며 최고 밥맛의 비결을 터득하게 됐다고 들려준다. 그리고 2002년 귀향해 지금의 음식점을 경영하며 쌀밥의 질적 향상에 주력해왔다는 것.
물론 쌀밥이 더욱 맛있을 수 있는 이유는 찌개, 나물, 생선구이 등 풍성한 반찬들이 있어서다. 매운맛, 단맛, 쓴맛, 신맛, 짠맛 등 오감을 만족시키는 각종 음식들. 청국장찌개의 경우 직접 띄운 메주콩을 뚝배기에 담아 보글보글 끓여내는데 제 고장에서 생산된 순수 토종 콩만을 이용한다. 정성으로 만든 이들 음식은 품격 있는 도자기 그릇에 단아하게 담겨 먹는 기쁨을 더욱 높여준다.
쌀밥정식은 반찬 등 상차림에 따라 1만원대에서 4만원대까지 다양해 취향과 형편대로 골라 먹을 수 있다.
이천쌀밥에 대해 손님들은 대체로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보인다. 경기도 가평에서 가족과 함께 이곳 식당을 찾은 김재욱(65) 씨는 "밥이 찰지면서도 구수해 식감이 좋다"면서 "특히 깊으면서 부드러운 맛의 청국장 등이 밥맛을 한껏 높여주는 도우미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직장동료들과 같이 온 김명식(32·서울) 씨는 "촉촉하면서 고슬고슬한 밥맛이 일품으로 젊은이 취향에도 딱 맞는다"며 "한 톨 한 톨 밥알이 달짝지근하게 살아 있고 한 상 가득 차려진 풍성하고 속깊은 반찬들을 맘껏 즐길 수 있어 좋다"고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 가을마다 열리는 쌀문화축제
대표적 쌀문화의 본향에 걸맞게 해마다 가을이면 이천의 설봉공원 일원에서 이천쌀문화축제가 열려 이천 쌀문화를 한 자리에서 살펴보고 그 맛을 즐길 수 있게 한다.
19회째를 맞은 올해 축제는 10월 18~22일 '오! 행복한 밥상~♪ 쌀 맛 나는 세상~♬'이라는 주제로 펼쳐졌다.
이번 축제에서도 '가마솥밥 이천명이천원'을 비롯해 '이천쌀밥 명인전' '600m 무지개 가래떡 만들기' '임금님 진상마차 행렬'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이 진행돼 40여만 명의 방문객을 불러들였다.
이천쌀문화축제는 2013년부터 5년 연속 문화관광축제 중 최우수축제의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쌀밥을 먹은 뒤 이천의 명소를 둘러보면 그 즐거움이 배가될 수 있다. 쌀문화축제 개최장소인 설봉공원에 가면 설봉호를 돌며 주변 풍광을 찬찬히 감상할 수 있다. 여유가 된다면 바로 뒤편의 설봉산(높이 393m)에 올라 삼형제바위와 설봉산성 등을 만나봐도 좋다. 이천이 도자기의 고장이기도 한 만큼 사음동과 신둔면 일대의 도예촌을 방문하는 것 또한 추천할 만하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ido@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