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지법 강연서 야구인생 회상…"형편 어려운 어린 친구들 돕겠다"
(수원=연합뉴스) 최종호 기자 = '국민타자' 이승엽(41)이 20일 익숙한 유니폼 대신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그라운드가 아닌 법원에 나와 23년 야구인생을 돌아보고 은퇴 이후 계획을 밝혔다.
이승엽은 이날 수원지법에서 열린 초청 강연회에 강사로 나서 우여곡절 많았던 자신의 선수생활을 담담한 표정과 말투로 돌아봤다.
그는 야구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초등학교 때부터 프로와 진학 사이에서 고민했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 투수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타자로 전향한 과정, 일본 프로야구 진출을 결정하던 순간 등 야구선수로서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섰던 경험을 먼저 떠올렸다.
이승엽은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항상 부모, 아내, 구단과 의견 충돌을 빚었는데 대부분 내가 원하는 대로 했다"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따랐다가 실패했을 경우 이들을 원망하기 싫었고 후회를 남기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삼성 입단 첫해인 1995년부터 2004년 일본에 진출하기까지 자신의 활약상을 돌아볼 때는 얼굴에 여유와 미소가 묻어났다.
특히 1998년 외국인 용병 타이론 우즈와의 홈런왕 경쟁을 떠올리며 유독 눈빛이 반짝였다.
이승엽은 "프로 첫해부터 좋은 성적을 거둔 데다 3년 차인 1997년에는 최연소 홈런왕을 차지해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때 우즈가 나타났다"며 "그해 결국 우즈에게 홈런왕을 내줬지만 절치부심해서 다음 해에 당시 한국 신기록인 54홈런을 쳤다"며 웃었다.
항상 최고의 자리에서 많은 기대를 받아온 데 대한 부담과 이로 인해 겪은 슬럼프를 전하는 대목에서는 선수 시절 못지않은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성적이 잘 나와서 내가 최고라는 안일한 생각이 들 땐 항상 뒤로 넘어지곤 했다"며 "또 한 시즌에 홈런을 30개 정도 쳐도 부진했다는 얘기를 들을 만큼 기대가 컸기 때문에 첫 FA를 앞둔 시즌에는 부담감으로 슬럼프에 빠졌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이어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에서 뛰던 당시 슬럼프를 겪을 땐 코치가 '오늘도 안타를 치지 못하면 2군행'이라는 통보를 하기도 했다"며 "그 말을 들으니 몸이 더욱 경직돼서 결국 그날 안타를 못 쳤는데 경기가 끝나고 코치가 '그래도 표정이 달라졌으니 앞으로 잘해달라'고 해 간신히 2군행을 면한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야구재단을 운영하고 싶다는 뜻을 조심스레 밝혔다.
이승엽은 "재능이 있는데 형편이 어려워 야구를 못하는 어린 친구들을 돕고 싶다"며 "마지막 FA 계약 때 받은 계약금 일부와 은퇴경기 때 구단이 준 보너스 등 총 4억으로 야구재단을 설립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선수 시절 기량 못지않은 인성으로 '국민타자'라고 불린 이승엽은 이날 1시간 30분에 걸친 강연 이후 예정에 없던 싸인 회를 여는 팬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번 강연은 법원 구성원과 시민이 소통하고 함께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고자 수원지법이 각계 인사를 초청해 강연을 듣는 '소통 아카데미'의 올해 마지막 순서로 열렸다.
참석 대상에 제한이 없어 광주, 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팬과 수원지법 법관, 직원 등 200여명이 법원 대강당을 가득 메웠다.
이승엽은 1995년 삼성라이온즈에 입단해 MVP 5회, 골든글로브 10회, 홈런왕 5회 등의 수상 기록을 보유했다. 2004년에는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해 7년간 활약했다. 한일통산 626개의 홈런을 친 그는 올해 시즌을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zorb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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