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보이스피싱 가담 사실 몰랐다면 죄 묻기 어려워"
사전에 알았다면 단순 가담자도 선처 않고 엄벌 기조
(전국종합=연합뉴스) 전창해 기자 = 다수의 서민을 겨냥한 보이스피싱 범죄는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이 커 사법부에서도 가담자에 대한 엄벌을 원칙으로 한다.
총책부터 단순 인출책까지 누구 하나 예외가 될 수 없는 일관된 기조다.
그런데 최근 보이스피싱 인출책에게 실형이 아닌 무죄가 선고되는 사례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같은 범죄를 저질렀는데 전혀 다른 재판 결과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보이스피싱 범죄인지 사전에 알고 가담했는지 여부가 사법부 판단의 중요한 잣대가 된다.
충북 진천에 사는 주부 A(32)씨는 아르바이트 일을 구하고자 인터넷 구직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얼마 뒤 한 무역회사 실장이라는 사람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세금이 과하게 잡히는 것을 피하고자 개인 은행업무를 보는 것처럼 가장한 수금사원을 구한다고 제안했다.
A씨는 탈법행위에 가담하는 게 꺼림칙했지만, 송금액의 1%를 수수료로 준다는 말에 혹해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지난해 8월 16일과 31일 두 차례에 걸쳐 회사 관계자로부터 받은 4천700만원의 돈을 지정된 계좌로 송금했다.
이게 문제가 돼 경찰 조사를 받게 된 A씨는 그제야 자신이 보이스피싱 조직의 인출책으로 일했음을 알게 됐고, 결국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법원은 이런 A씨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청주지법 형사항소1부(구창모 부장판사)는 26일 A씨에게 원심과 같이 무죄를 선고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자신이 탈세를 목적으로 한 수금사원으로 근무한 것이라 믿고 있었던 피고인으로서는 다른 공범들과 보이스피싱 범죄를 실현하려는 의사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귀금속 수입 판매업체에서 수금 아르바이트를 하는 줄 알았다가 보이스피싱 범죄에 연루된 B(36)씨도 비슷한 경우다.
B씨는 지난 3월 9일 수금 업무를 시작한 지 이틀 만에 은행 근처에서 잠복해있던 경찰에 붙잡혔다.
B씨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1심에서 유죄가 인정돼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철창신세까지 지게 됐다.
하지만 4개월여 뒤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돼 풀어날 수 있었다.
당시 원심을 파기한 청주지법 형사항소2부(정선오 부장판사)는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이 유사한 방법으로 속아서 돈을 송금하게 되는 점에 비춰보면 피고인 역시 조직원에게 속아서 이용당한 또 다른 피해자일 개연성이 높다"며 무죄 선고 이유를 설명했다.
물론 보이스피싱 범죄임을 알고 가담했다면 엄벌을 피할 수 없다.
대전지법 형사3단독 김지혜 부장판사는 최근 사기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보이스피싱 인출책 C(23)씨와 D(23)씨에게 각각 징역 4년과 3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C씨는 중국에 있는 보이스피싱 조직원에게 범죄자금을 송금하는 대가로 10%의 수수료를 받기로 했다. 그리고 친구인 D씨도 끌어들였다.
이렇게 C씨 등이 지난해 12월 12일부터 30일까지 보이스피싱 조직원에게 송금한 범죄자금은 무려 152차례에 걸쳐 1억2천여만원에 달했다.
앞서 지난 9월 부산에서도 보이스피싱 인출책에게 실형이 선고된 바 있다.
부산지법 형사3단독 윤희찬 부장판사는 전자금융거래법 위반과 사기방조 혐의로 기소된 E(21)씨에게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
수사 결과 E씨는 지난 4월 보이스피싱에 이용될 것을 알면서 다른 사람 명의의 체크카드 11장을 건네받아 보관했고, 이 카드로 입금된 범죄자금 1천900만원을 보이스피싱 조직원에게 송금했다.
윤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피고인과 같은 전달·인출책 등의 행위로 보이스피싱 범행이 완성되고 이로 인해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한다"며 "인출책은 선처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이스피싱 범죄를 근절하려면 엄하게 처벌함이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jeonc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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